사순 제3주간 토요일: 루카 18, 9 - 14

by 이보나 posted Mar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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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8,14) 

마태오 복음은 마리아 남편 곧 예수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을 소개하면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까닭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일깨우려는 가르침입니다. 혹여 우리 역시도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도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스스로 의롭다고 처신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 봤으면 싶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같지 않기에” (이55,8참조), 하느님은 사람의 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내를 보십니다. 이를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주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17,9~10) 그렇습니다. 인간은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 등과 같이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인간과 달리 사람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기에 낮추어진 마음과 부서진 영혼을 하느님은 더 사랑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좀 더 음미하기 위해 톨스토이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수록된 짧은 단편 소설 「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여인이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한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 할 죄를 짓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현자는 먼저 첫 번째 여인에게 “울타리 밖에 나가 당신이 들 수 있는 큰 돌을 하나 찾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또 다른 여인에게는 “그대는 가능한 한 많은 돌을 가져오되 작은 돌만 가져오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들에게 가지고 온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자리에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돌이 있었던 곳을 금방 찾아내어 그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어디서 어떤 돌을 주웠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인은 자신이 어디서 그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크고 무거운 돌을 쉽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그대는 어디서 그 많은 작은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요. 죄도 마찬가지라오.”』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스스로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의 기도하는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바리사이의 위선을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질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차례 정기적인 기도를 바치고 있으며, 늘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간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11~12)라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었기에 하느님 앞에 부복하지도 않았고 어깨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도 모자라서, 뭐 잘났다고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깔을 부릅뜬 채 하늘을 바라보는 그 자세 자체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간인지 그리고 겉모습으로 드러난 꼬락서니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교만하고 자기 잘난 맛으로 똘똘 뭉친 속물임을 감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자세야 사랑이신 하느님과 각자의 친밀 정도에 따라 다르게 드러날 수 있지만, 일단 기도의 자세에서 중요한 점은 몸과 마음은 하나, 身心一如라고 하는데, 이 점에서부터 그는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가 사랑의 대화라는 관점에서도 그의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 곧, 듣고 말하는 인격적 대화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자화자찬의 독백이며 넋두리 수준이고, 더 큰 문제는 바로 그의 소위 기도 내용입니다. 선거 유세처럼 자신이 스스로 잘했다고 하는 일을 세리와 비교해서 늘어놓은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 세리를 비하하는 악성 뜬소문과 원색적인 비방으로 일관하면서, 그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악습까지 드러냄으로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확실하게 비춰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하는 자세와 태도 그리고 그 내용을 반추하면서 한 번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기도 생활을 성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이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영적 감각이 둔하다고 하더라도 이내 하느님 앞에 누가 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을지 알 수 있을뿐더러, 우리 기도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게 되잖습니까? 당연히 하느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은 세리였습니다. 늘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지, 왜 눈을 감고 감히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는지 세리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리의 내외적 자세와 마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셨을 것이며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러기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18,14) 고 분명하게 표현하십니다. 세리의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며,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설 우리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 영혼이 아무리 쓰레기와 같은 영혼을 황금으로 감싸고 포장한다, 고 해도 그 본모습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금했다 해도 쓰레기는 쓰레기입니다. 금으로 감싼 쓰레기와 같은 영혼은 처음에는 겉모양만 보는 인간에게 착시와 착각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뽀록이 드러나고 마침내 그 속내에서부터 풍기는 악취를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 길 물속 같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을 속이고 기만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부터라도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세와 함께 자기 정직과 진솔을 바탕으로 기도했던 세리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비에, 사랑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 생활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기도는 사랑의 만남이며,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을 통한 대화이자 소통이며, 마침내 사랑의 친교와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밀월입니다. 

오늘 기도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로 바치겠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만유 위에 흠숭합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지복至福안에서 저는 기뻐합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시는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저는 원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 주소서. 그대로 하리이다. 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처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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