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하느님 체험

by 후박나무 posted Mar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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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원의 한 서점에 있는 40 여석 남짓의 작은 상영관에서 엔도 슈사쿠 원작소설 “침묵”을 영화화한 “Silence”를 보았다. 서구 선교사가 오기 훨씬 전부터 그 땅과 문화, 역사에 이미 계시던 하느님과 나중에 서양이라는 독특한 프리즘을 통해 해석되고 조직화된 하느님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전자의 문화만 오류로 부각되고 후자의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으로 해석된 하느님도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는 이해는 인색하다. 허리우드 영화의 한계 같다. 오늘날에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선교의 의미도 대화, 소통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대화와 소통이 생산적이 되려면 가급적 각 개인이 원체험이랄 수 있는 하느님체험을 직접 해야 한다. 하느님 체험은 보통 인생길에서 길을 잃었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 얼마나 거칠고 황량하고 험한

숲이었는지 말하기 힘든 일이니,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알리기에리 단테 신곡 지옥편 제1곡)

 

십우도(十牛圖) 혹은 심우도의 첫 장면도 잃은 소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목동은 자신이 소를 잃은 것을 알고 잃은 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것이 바로 구도(求道)의 시작이다. 심우도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를 잃었다고 자각(自覺)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는 또 어떤가? 둘째아들의 아버지 체험은 그가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되지 않는가?

 

왜인지는 알수 없으나 근원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원심력과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구심적인 힘이 영성생활의 큰 두 요소인 듯하다. 원심력은 나쁘고 구심력만 있어야 한다는 이분법적인 이해보다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메커니즘이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요소가 작용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