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서정주의 "자화상(自畵像)"

by 후박나무 posted Aug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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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1시, 어제는 3시에 깨더니, 오늘은 새벽 2시에 잠들다^^  오늘과 같은 복음을 읽었던 지난 8일 도미니꼬 축일부터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분다. 역풍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당 서정주의 “자화상” 이 겹친다. “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다” 는…….

 

 

서정주의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니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 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우리를 키우는 바람은 물론 순풍(順風)이 아니라 역풍(逆風)이다. 예수의 제자든 서정주든 대부분의 우리는 애비가 종인 비천한 출신이면서 동시에 동학에 참여한 이의 자손이다. 역풍은 순응치 않고 자기로 살려 할 때 몰아친다. 엘리야처럼 예수의 제자들에게 제일 힘들었던 파도는 ‘자기회의’ 이었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광풍을 겪고 불과 지진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가녀린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미션을 받는 엘리야! 우리도 나날의 역풍과 곤경을 통해 해야 할 바를 찾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