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열쇠구멍

by 후박나무 posted Aug 15,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며칠사이 날씨가 변해 이젠 서늘하다 못해 한기가 느껴진다. 참 변화무쌍하다. 이러니 “빨리 빨리” 가 한국 사람의 별명이 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산 날이 살날보다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앞날에 대한 생각보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37년 전 오늘은 공식적으로 예수고난회의 외부 지원자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날이다. 이를테면 사람의 한평생에 몇 번 안 되는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자신의 전 생애의 의미를 명징(明澄)하게 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타볼 산의 예수님이나 마니피깟을 노래하던 순간의 마리아는 그런 순간을 지나시는 듯하다. 그 섬광의 빛은 당신 삶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비추어,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게 할 것이다. 마치 번개가 번쩍 세상을 비출 적에 어둠에 잠겨있던 세상이 온전히 드러나듯, 자신의 삶이나 역사의 진행방향을 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런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던 순간 대부분의 촛불시민들도 마니피깟을 부르는 마리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황홀한 순간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다. 다시금 돌아가게 되는 일상은 암중모색, 회의 속의 삶이다. 신앙생활도 동일하다. 부활의 빛으로 보았던 세상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 믿음으로 어두운 일상에 빛을 비춘다.

 

성석제씨의 ‘후기’를 다시 본다.

“내 인생은 순간(瞬間)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돌은 매끈하고 어느 돌은 편편하다. 굴러 내린 돌, 금이 간 돌, 자갈이 되고 만 돌도 있다. 아래쪽의 넓적하고 큰 돌은 오래된 것들이고 그것들이 없었다면 위쪽의 벽돌들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 성벽은 도대체 누가 쌓은 것일까.

순간이여, 알아서 쌓여라. 누구든 나를 대신해서 순간을 쌓아다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른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