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과 이명박의 '대통령의 시간'

by 후박나무 posted Apr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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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전반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었다. 페이지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던 그 용기와 진실성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동시에 나는 아마 나이 들어서도 평생 ‘고백록’ 이라든가 ‘회고록’ 혹은 ‘자서전’ 은 못쓸 거라는 생각도 했다. 고백록 정도의 진실한 글을 쓰려면 자신의 치부까지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럴 자신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고록 형식의 글을 쓰지만 대부분이 자화자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제일 큰 이유는 無明-자기 자신을 모르는-이 제일 큰 원인 일게다. 지금 走馬看山격으로 내가 살아온 삶에서 근간이 되는 큰 뼈대만 추려보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수준의 진솔함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만 그래도 이명박씨의 ‘대통령의 시간’ 보다는 나을 것 같다.

 

종교의 역사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00 년 남짓이라는데 비해 영성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 그 궤를 같이한다. 나 한사람의 영성과 고난회의 영성을 견주어 보아도 개인의 영성이 훨씬 먼저 시작되었다. 어릴 때-4세-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따른 상실감, 빈 구멍(Lacuna) 은 환경적인 영향과 어린나이로 인한 표현불능으로 인해 마음속 깊이 사장되었다. 샤카무니의 경우와 같이 훗날 뚱딴지같은 일을 계기로 격발되기까지 묻혀있게 된다.

 

어머니가 없이 자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마음의 중심이라든가 마음의 고향, 마음의 지주 없이 사는 것과 같다. 나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지주를 찾았던 것 같다. 주로 책을 통해서. 공자의 논어에 흥미를 느끼던 중3 시절, 난생 처음 성서라는 책을 보았고 그중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설교를 설 하던 예수를 만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2월의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때 혼자 외할머니 댁에 있다가 심심해서 서가에서 고른 책이 하필이면 성서였던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고 2까지 개신교 예배에 참석했다. 고3이 되면서 입시준비도 해야 했고, 목사님의 문자 주의적 해석에 염증을 느껴 교회를 멀리하고 스스로 진리를 찾기 시작하다. 나의 진리탐구, 진정한 종교를 찾는 노력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기도, 절박하기도 했다. 대입시 바로 전날에도 나는 ‘거듭나야 한다’ 고 주장하는 극동방송의 권신찬 목사 사택까지 찾아가 구원을 묻는 등 아주 절박하였다.

 

긴 이야기 짧게 하겠다. 팡세의 영향아래 대학 1년 때의 ‘나도 죽는다’ 는 깨달음후 여호와의 증인 삼선교회중의 파이어니어에게 6달을 배우고, 자신들만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환멸을 느껴 결별하고, 여러 종교를 연구 섭렵하던 중 혜화동 성당의 박귀훈 신부를 만나 영세를 받게 된다. 74년 9월 28일. 그러나 삶의 허무를 극복하고 부활체험을 한 것은 한참 후이다. 부활체험후 81년 고난회에 입회하다. 그후 나 자신의 체험과 역사 속에 배어 있는 영성을 고난의 신학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일을 함.

 

나에게는 2가지 성소가 있다고 상정한다. 영세명과 수도명에서 성소를 추출해본다.

 

1. 내 생년월일은 1월 15일이다. 처음 혜화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을 때 수녀님이 다른 설명 일체 없이 바오로라는 영세명을 주셨다. 집안에서 신자라고는 내가 효시였으므로 달리 물어볼 데도 없었고 누구에게 쉽사리 물어볼 사람도 아닌지라,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본명을 사도 바오로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오로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결국 내 본명은 사도 바오로가 아니라 이집트인 은수자 바오로임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안 된다. 토마스 머튼의 저널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 성소는 먼저 은수자로 사는 것이다. 은수자로서 우선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고 묻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물고기 꿈이 일생에 걸친 테마를 던져준다.

 

2. 두 번째 성소는 수도명으로 받은 가브리엘레 돌로라따, 통고의 성모 가브리엘이다. 박도세 신부님은 제가 고난회 신학생들의 주보성인인 가브리엘의 역할을 바라셨던 것 같다. 수도회에서 피정지도나 양성지도도 했지만 더 큰일은 후학들을 위한 번역과 글쓰기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