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정지용의 '고향'

by 후박나무 posted Apr 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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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거의 일주일이나 빨리 온 더위로 꽃들이 절기에 맞게 순서대로 피는 게 아니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피고 바쁘게 져 버린다. 꽃들도 마치 ‘바쁘다 바빠’ 하는 듯하다. 오늘 아침 미사후 거의 2주 만에 우이령을 오르다. 우이령은 그래도 높이가 있어 그런지 아직 산 벚꽃과 진달래, 복사꽃이 화사하다. 벚꽃은 필 때, 져서 날릴 때, 쌓일 때 세 번 즐긴다고 하는데, 오늘 셋을 다 볼 수 있었다. 라일락도 며칠후면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다. 라일락 꽃 향기와 함께 여지없이 그 기억도 재생되겠지!

 

옛 시인은 `연년세세 화상사 세세연년 인부동(年年歲歲 花相似 歲歲年年 人不同‘) 이라 하였지만, 꽃이라고 어디 같은 꽃을 피우겠는가? 사람도 해마다 변하기에 부활시기마다 반복하여 듣게 되는 엠마우스 이야기도 달리 다가온다. 나이를 먹어가며 잡다하고 쓸데없이 복잡하던 관점도 수렴되어가는듯하다. 그 관점에서 보면 복음의 이야기는 기적 같아 보이는 치유사화도 포함하여 우리의 일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에게 아무렇지도 않던 옥천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고향이 되듯, 대부분은 그냥 무의미하게 혹은 남용되며 쓸려가는 일상을 잠깐 멈추어 바라볼 때, 정지용의 고향 같은 새삼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까!

 

스케일 크게 대지를 제단으로 삼고 이 땅위에서 그날그날 벌어지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웃음과 울음, 피와 땀과 눈물과 감사, 죄까지 제물로 바칠 수 있을 때 우리의 일상이 엠마우스의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