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by 후박나무 posted Jan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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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대 예언자들의 스펙터클한 소명사화에 비하면 사도들의 부르심은 소명사화라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다. 불타는 가시덤불의 모세, 불과 지진 후의 가녀린 목소리를 듣는 엘리야, 더 이상 어린아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며 중책을 맡는 예레미야, 자신이 가겠노라고 먼저 나서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야…….

 

처음엔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이 소위 가방끈이 짧은 관계로 풍요로운 자신들의 종교전통에 접할 기회가 적었고 그 결과 폭넓은 자기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짐작했었다. 오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란 개념에 입각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그는 정신이상자나 성격 파탄자는 아니었다. 지극히 가정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란 책에는 악의 평범성(일상성) 이란 말이 딱 한 번, 그것도 맨 마지막 문장에 등장한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뿔이 달린 악마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악이 그렇게 일상에 내재하는 것이라면, 죽음의 힘을 몰아내는 생명의 힘도 우리 가까이 아주 가까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사도들이 일상의 고기잡이나 세관에 앉아 있을 때 부르심을 받는 이야기는 특별히 피정을 가거나 성전에 올라가서야 하게 되는 체험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일상 속에 계시는 임마누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