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푸코의 진자

by 후박나무 posted Dec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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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라고 말하기도 쓰기도 어색했는데 어느새 그 해도 다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올해 마지막 날 교회가 제시하는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에 대해 진술하는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이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성서를 필사하는 사람들은 일점, 일획도 첨가하거나 누락시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말씀인 로고스에 오류가 생기면 이 세계의 창조질서도 무너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 에는 성스러운 경전을 가지고 지적인 장난을 쳐보려던 주인공 셋중의 한 명인 디오탈레비(자칭 유태인)가 갑자기 암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어 병상에서 벨보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힌 이야기 속에 사막을 헤매는 기분이었던 나에게 오아시스 같은 감동을 주는 단락이었기에 길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랍비 아키바의 문하에 있을 당시, 랍비 메이르는 항용 잉크에다 황산을 섞어서 썼네만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랍비 메이르로 부터, 자기가 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질문을 받고서야 스승은 이렇게 대답하지……. <옳다. 글을 쓸 때는 독을 다루듯이 조심을 다하여야 하니, 이것이 곧 하느님의 정하신 이치인 까닭이다. 한 자를 빼먹어도 안 되고, 한 자를 더 써넣어도 안 된다……. 그러면 온 세상이 무너진다>. 그런데 우리는 '토라'를 다시 쓰려고 했어. 쓰면서도 더 써넣는지 빼먹는지 도무지 신경 쓸 줄을 몰랐어 ……. 말씀은 가지고 장난하는 게 아니야 ……. 세상에, 세계를 일으켜 세우지 않는 글이 어디 있고 마침내 말씀이 되지 않는 글이 있던가? '말씀의 서(書)'를 다시 배열하는 것과 세계를 다시 배열하는 것은,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야. 이 이치에서는 아무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 어떤 책이든, 심지어는 철자법을 가르치는 책까지도 결국은 마찬가지네. 자네가 좋아하는 바그너 박사 같은 사람들은 그러지 않더냐고. 말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들, 철자 바꾸기를 즐기는 사람들, 말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사람이야말로, 영혼에 때가 끼어 그 아비를 미워하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정신 분석가와 랍비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야. 자네는 랍비가 '토라' 이야기를 하면 그게 두루마리 이야기인 줄 아나? 랍비는 언어를 통한 우리 육신의 되 빚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잘 듣게. 말씀의 글자를 다루자면 경건함이 있어야 하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었어. 책이라고 하는 것 중에 하느님의 이름이 가로로 세로로 짜여져 있지 않은 책은 없어.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도 없이 역사책의 철자를 마음껏 뒤바꾸었네. 정말 잘 들으라고. '말씀의 서'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곧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네. '말씀의 서'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곧, 읽고, 고구하고, 다시 씀으로써 제 육신을 움직이는 것이네. 무슨 까닭인가. 우리 육신의 부분부분에, 이 세계와 조응하지 않는 부분이 없기 때문일세 ……. '말씀의 서'를 바꾸는 일은 곧 세계를 바꾸는 일이야. 세계가 바뀌면 우리 몸도 바뀌어. 우리는 이것을 몰랐던 거라고.

 

'말씀의 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언약궤에서 흘러나오게 하네. 말씀은 세상에 나왔다가는 곧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말씀은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한 순간뿐, 그것도 그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드러내네. 구중궁궐의 구중심처로 몸을 숨기는 아름다운 여인과 같아. 여인은, 세상 어느 누구도 모르는 어떤 사람을 기다리네. 만일에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나 취하려고 하면, 그래서 더러운 손을 내밀면 여인은 뿌리치고 말아.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그래서 문을 살그머니 열고, 모습만 살짝 보이고는, 아니면 다시 숨어 버리는 것이네. '토라'의 말씀도,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이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장난하는 마음으로 책에 접근했던 것이네 …….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 우리가 감당도 하지 못할 일을 꾀했던 것이네. '말씀의 서'에 나오는 말씀을 조종하여 골렘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야.“

 

- 푸코의 진자, pp. 1045-1047

 

 

 

2018년의 마지막 날을 요한복음의 시작으로 갈무리한 교회는 2019년 평화의 날인 1월 1일 이후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간다.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디오탈레비를 통해 권고하듯, 새해에는 조금 더 말씀을 경건하고 책임감 있게 대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