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동정 순교자 마리아 꼬레티

by 후박나무 posted Jul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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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갑자기 스마트 폰이 말을 안 들었다. 이것저것 강구해보았으나 별 무소용. 오늘 AS 센터에 가기로 하고 자리에 들다. 올해 들어 가장 깊게 오래 잠을 잘 수 있었다. 11시경에 침대에 누웠는데 4시에 한번 깨어 잠시 놀다가 다시 6시까지 잤다. 잠이 보약이라더니 몸도 개운하다.

 

오늘은 동정 순교자 마리아 꼬레티 기념일이다. 교회는 변천해가는 사회적 환경 한가운데에 서서 특별히 그 시대에 증거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가치를 천명한다. 교회가 보존하고자 하는 가치와 가르침은 교황의 교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성인품에 올리는 이들의 면면을 통해서도 선포된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농사일에 전념하는 어머니 대신 꼬레띠는 동생들을 돌보고 요리를 하고 빨래 등의 일을 모두 떠맡았는데, 이런 가사는 11살의 소녀에게는 힘에 부치는 중노동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농사일에 도움을 주는 이웃의 부자(父子)중 아들인 알레산드로는 부적절한 언행으로 마리아를 힘들게 했다. 그러던 그는 나이 20세에 끔찍한 죄를 짓게 된다. 그는 30년의 복역 형을 선고받았다. 알레산드로는 교도소에서 형을 다 산 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알레산드로는 이 편지로 그 시대에 마리아 꼬레티는 어떤 의미였는지를 밝힌다.

 

 

Alessandro Serenelli 는 마르체라따(Macerata)의 카푸친 수녀원에서 1970년 5월 6일 선종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유산으로 1961년 5월 5일 다음의 증언을 남겼다.

 

"이제 내 나이 80이 다 되었으니 곧 떠나게 될 것이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젊었던 시절 잘못된 길을 택했었고, 그 길은 나를 파멸로 이끌었음이 보인다.

 

"나의 행실은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흉내 내는 나쁜 표양이나 출판물, 대중 매체의 영향을 받았다. 나도 그 젊은이들과 똑같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내 주위에는 마음이 넓고 헌신적인 사람이 많았지만 격렬한 힘이 내 눈을 멀게 하고 잘못된길로 나를 밀어 넣었기에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나이 20세 때 욕정으로 인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 기억은 내 자신을 혐오스럽게 한다. 지금은 성녀가 된 마리아 꼬레티는 은총으로 내게 파견된 천사로서 나를 인도하고 구원했다. 이제껏 나의 가슴은 그녀가 나를 꾸짖던 말씀과 용서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의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살해한 나를 위해 기도하고 탄원한다. 나는 30년의 교도소생활을 했다.

 

"만약 내가 성인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종신토록 교도소에서 살았을 것이다. 내가 저지른 죄이기에 단죄를 받아들인다.

 

"어린 마리아는 진정 나의 빛이었으며 나의 보호자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27년간 모범적인 죄수로 살았으며 다시 한 번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정직하게 살려고 애쓸 수 있었다. 마르케의 카푸친회 프란치스칸들은 나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 주었다. 나는 그들의 공동체에서 24년을 살았다. 지금은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뵈올 때를, 내가 사랑하던 이들을 다시 만날 때를 그 다음에는 나의 수호천사와 그녀의 어머니 아순타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쓰는 이 편지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이처럼 악을 피하고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좋은 가르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종교의 계명이란 우리가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계명은 삶의 진정한 위안이며 진정한 힘으로서 어떤 환경에서도 심지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도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다. “

 

Alessandro Serenelli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