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었다. 누가 아니랄까봐 엊그제는 십자가 밑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우리는 복음의 3분의 1 이상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다룬 수난 사화임을 잊고 ‘진복팔단’ 이라든가 ‘행복선언’ 만을 선택적으로 기대하는 것 같다. 그 결과 삶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인 고통은 불필요한 요식행위쯤 되어 없으면 더 좋은 천덕꾸러기가 된다.
히브리서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에 4가지를 더해 애별리고(愛別離苦)·원증회고(怨憎會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 등의 고난은 삶에서 파생되는 부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름 삶이라는 사이클을 완성하는 필연적인 존재가 아닐까? 그 주기를 통과하므로 써만 삶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행복도 그중 하나가 아닌가? 불면증은 여러 면으로 사람을 철학자로 만든다.
고통에 시달릴 때 기억하면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는 시들이 있다. 시편 6장도 그중 하나다.
주여 나를 역정으로 꾸짖지 마옵시고
진노하심으로 벌하지 마옵소서
내 힘이 다하오니 주여 가엾이 보아주소서
나를 고쳐 주소서 뼈가 무너나나이다.
내 영혼 이다지도 어지럽건만
주여 당신은 언제까지나?
주여 돌아 오시와 이 영혼 건지소서
자비로우시오니 이 몸 살려 주소서
죽은 뒤면 당신을 생각도 못하오니
지옥에서 그 누가 주님 기리오리까
시름에 겨운 이 몸 흐르는 눈물
밤마다 잠자리를 적시나이다
눈물에 이부자리 젖어 드나이다
수심으로 이 내 눈 침침해 오고
원수들 등쌀에 어두워지나이다
악을 짓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시를 읽는 것이 부담스러운 분들은 운율을 붙인 노래로 가톨릭 성가 222장, ‘주여 나를 가엾이 보아주소서. 나를 고쳐 주소서. 내뼈가 무너지나이다…….’를 나지막하게 심정을 쏟아 부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