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날카로운 화살

by 후박나무 posted Apr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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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Man of Letters 로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적인 체험을 하필이면 도서관에서 했다.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과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으니 도서관이 그런 체험을 할 확률이 높은 곳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학 1학년 때 국립중앙도서관은 지금 명동의 롯데백화점과 대한항공본사가 있는 근처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당시 중앙도서관은 나같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 보다는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고시준비생들의 전유물이었다. 여하튼 그 해 화창한 봄날 아침 삼단 논법을 읽다가 그만 너무나도 명징(明徵)하게 ‘나는 죽는다’를 깨닫게 되다. 그 충격은 대단하였다. ‘나도 죽는다’ 는 사실 ‘저 광대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삶의 실상을 본 충격으로 3일간 식음을 전폐했을 뿐 아니라 그 후 몇 년간 허무가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단지 죽음의 확실성을 논하는 삼단논법에 의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쳤다기 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내면에 메꿀 수 없는 Lacuna가 생겼으나 형편상 없는 듯이 감춰두었던 것이 그 심연을 드러낸 것이리라. 삶을 소리 없이 집어 삼키려는 그 허무에서 벗어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삶이 그토록 허무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삶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오른쪽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한다. 그는 뜻밖에도 “너는 정녕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약속을 받게 된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이들이 구리 뱀을 보고 살아난 것처럼 이 죄수도 눈을 돌려 바라봄으로 살아나게 된다. 나는 성서의 이 구절에 자꾸 이백의 獨坐敬亭山 의 시구가 겹친다. 광야에서 구리 뱀을 바라보던 시선이나 죄수가 예수를 바라보던 시선이 꼭 이럴 것 같다.

 

獨坐敬亭山(독좌경정산-경정산에 홀로 앉아)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상간량불염)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새무리들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히 흐르네

서로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는 것은

오직 너 경정산 뿐이어라

 

다른 하나는 충격적인 것이기 보다, 마음에 동이 트는 체험이었다. 사실 책을 새로 사거나 명저로 소개받은 책을 펼 때마다 우리는 이런 유의 체험을 기대한다. 물론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책은 매우 드물지만! 명동에서 남산으로 옮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으면서 역사란 ‘승자의 기록’ 임을, 사물이 관점이나 프레임에 따라 얼마나 달리 보이는지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보통 교과서에서 배우는 남북전쟁은 승자인 북군의 입장이나 관점, 틀(frame)로 해석한 것이다. 마가렛 미첼은 이런 일방적인 시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다만 남부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반대의 관점을 제공한다. 예언자라 하면 우리는 쉽게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격으로 모 아니면 도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연상한다. 그러나 여기 이사야와 같이 high class 출신으로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사람을 내면으로부터 움직이게 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예언자도 많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긍심을 갖고 야훼께서 자신을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벼리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