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모병원에 다녀오느라 며칠 집을 비웠다 돌아오니, 솔이가 앓는 소리를 하며 막무가내로 얼굴을 비빈다. 다른 개가 나를 보면 냄새로 솔이 인줄 알겠다, 이구…….
성서는 낙원과 낙원의 상실, 그리고 잃은 낙원을 되찾으려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인 동시에 인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세상 살면서 한 두 번은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낙원과 실낙원, 복락원을 오고 가기 마련이니 말이다. 낙원의 상실은 아담과 이브의 원형적인 이야기가 시사한 대로 각자의 내면에 이미 프로그램된 소프트 웨어 업식, 편견 혹은 무명에 기인하고.
혹자는 한 번도 낙원에 있어본 적이 없어 잃을 것이 없다고도 하겠지만, 남루한 일상이 우리를 구원하는 법이다. 아무것도 아닌듯한 일상이 낙원이었음은 잃음을 통해서야 배운다.
대림절에 자주 읽는 이사야서는 잃었던 낙원을 되찾으리라는 희망과, 되찾을 낙원의 모습을 자주 언급한다. 그리스도교판 무릉도원 되겠다. 예수님의 접근은 먼저 산에 올라 진복팔단을 설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 소경임을, 병들었음을 깨닫고 치유를 청하게 하신다. 그 절정은 오른쪽 강도의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와 “정녕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다. 오늘 우리는 몇 번이나 낙원과 실낙원, 복락원의 과정을 거치게 될까? 깨어있는 정도에 따라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축일이다.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니 선교방식도 당연히 다르겠지만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Agere sequitur Esse!(행위는 존재를 따른다) 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선교사에게 나름 낙원을 잃고 되찾아 보았기에 존재가 변화된 체험을 요구한다 |
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