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별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많은 경우 판에 박힌 이름 말고 서로를 부르는 고유한 호칭이 있다. 그 호칭은 대개 그들만이 갖는 추억이나 공유했던 체험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하느님, 상상치도 못했던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체험이 있는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고유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당사자는 쉽게, 사람과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이뤄진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
요한복음사가에게 랍비 예수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어린양” 이었다. 예수는 유월절의 어린 양처럼 죽음에서 생명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게 하는 통로, 길(Gateway) 이었다. 진정한 종교나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이 차원에서 저 차원으로 옮기는 운수업이라 하기도 한다.
오늘은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기리는 십자가 현양축일이다.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이 거룩한 성체성사가 되듯, 우리의 남루한 일상이 십자가를 현양하는 성사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운수업이 주업이지만 부업으로 숙박업도 하는 우리는 가끔 얼굴 한번 닦고 빨래 통에 던져 하루에 수건 5장을 쓰는 피정자를 보게된다. 아마도 자기 스스로 세탁기를 돌리고 널어 말리고 개키는 일을 해봤다면 그러지 않을 듯싶다. 아무것도 아닌 듯싶은 이런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거나 남을 배려할수 있을 때, 바로 그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성사요, 십자가 현양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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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