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음력 정월 대보름의 복음은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다. 이것은 루카 6: 20~26 의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에 살과 옷을 입혀 드라마화 한것이라 할 수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던 루카 복음사가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의 분위기가 마태오 복음의 진복팔단과는 뉘앙스가 다른 복음을 생산하고 전하게 했을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깟) 도 사실 쥐구멍에 볕뜰날이 온다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그럼 부자는 부유했던 것이 죄라서 벌을 받는 것인가? 아마 아닐 것 이다. 부자의 죄는 정서, 대인관계에서 공감 능력 부족, 죄의식, 양심의 가책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일종의 사이코패스일 것 같다. 그는 아마도 가족이기주의로 공감능력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는 뻗치지 못한 듯하다. 그에게는 문간에 놓인 나자로의 비참함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예수의 사목중 두드러진 것이 다른 계층,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친교 Table-Fellowship 이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기 마련이어서, 쉽게 폐쇄적인 자신들만의 천국을 연출하기 쉽다. 아마 부자도 그러했으리라. 자신의 가족이란 울타리, 같은 계층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과 다른 계층,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친교를 가져야 한다.
박태원 가브리엘 C.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