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서 자전거만 타며 며칠 휴가를 한 적이 있다. 시속 20 킬로의 삶에 익숙해졌던 몸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시속 100 킬로 속도의 차속에서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 됐었는지 기억도 선명하다. 알게 모르게 시속 100 킬로의 속도와 소음에 적응하여 산다는 도시인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일상화된 불안과 긴장, 초조함에 젖어 그 스트레스가 클지 가히 짐작이 간다.
세월호 사건은 차치하더라도 올해만 해도 리조트 붕괴서부터 시작하여 최근 환풍구 사건, 동서식품 까지 참 많은 재난사고가 있었다. 그때마다 매스컴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사고원인은 “인재”다. 과연 그것뿐일까? 율리히 벡의 “위험사회”에서 지적하는 대로, 이미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운송 등 규모가 되지 않으면 도태되는 구도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던 시대는 설 자리가 없어진지 오래다. 그리고 이리 큰 규모와 복잡성으로 구축되어 돌아가는 시스템을 과연 인간이 제어할 능력이 있을까?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나 약함을 생각하면 언제든 실수는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소달구지의 바퀴가 빠지는 사고가 일어날 확률과 KTX 의 바퀴가 빠질 확률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확률이 100분의 1 이라도 고속전철의 바퀴가 빠지면 지난번 스페인의 기차사고에서 보듯 대형 참사다.
광주명상의 집 원장 시절에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가 나자 탁상행정이란 무엇인지 명료하게 보여주는 퍼퍼먼스가 있었다. 책임소재를 두고 한 차례 매스컴에서 난리를 치더니 광주 북구청에서 한 장의 공문이 날아왔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프로판가스통의 저장소를 안전하게 개조하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척 촉박한 시일 내에! 참 무모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여 공문을 들고 북구청의 담당 공무원을 찾아갔더니 피로에 절은 얼굴을 한 50대의 주사셨다. 내가 어떻게 이런 공문을 날리느냐고 항의했더니, 그분은 오히려 나에게 하소연하시는 것이었다. 북구청 관할 하에 프로판 가스를 사용하는 요식업체만 해도 500 여 곳이 넘는데, 이런 업무가 기존의 업무에도 치이는 자기 한 사람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500 곳이 넘는 영세 요식업체가 공문대로 정해진 시일 안에 공사를 마칠일도, 마쳐 보고를 한다 해도 주사 한 사람이 처리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러고선 나중에 다시 사고라도 나면 책임은 그 주사에게 가는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지시를 하거나 매뉴얼을 만들고 그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단 공무원이나 담당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인재라고 떠벌린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인재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사회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희생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거기다가 어쩔 수 없이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다른 한계, 부패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4대강 사업, 온갖 편법을 동원한 롯데월드 건설, 원전 비리등으로 인해 예견되는 재앙등.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커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다룰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원자력 발전을 이윤을 위해 지속하고 계속 건설하려는 사람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죄 때문인가? “사람은 그물을 짜는 존재가 아니라 그물의 한 코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그물처럼 서로 얽혀 있다. 사람이 그물에 한 행위는 바로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We did not weave the web of life, we are merely a strand in it. Whatever we do to the web, we do to ourselves.” Chief Seattle
세상은 더도 덜도 없이 내가 변한 만큼만 변한다 박태원 가브리엘 C.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