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9
아마 십여 년은 지난 것 같다. 고대의 매스컴 센터인가 하는 곳에서 “바닷마을 다이어리” 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잔잔한 영화를 보았다. 폭력물이나 성인 만화영화같은 상영물이 넘쳐나는 시대에 아이러니하게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가 내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 잔잔함도 잔잔함이었지만, 영화 거의 마지막 부분에 맏딸로 나오는 사치의 독백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사치의 이 선언은 가히 한 소식을 전하는 선사의 오도송이라 할 수도 있을 거다. 혹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본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 탓인가 하는 구도 외엔 다른 가능성이 없는 듯 거짓된 프레임 속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이 빠져나와, 말하자면 플라톤의 동굴을 벗어나 바깥세상을 보고 온 사람의 시야로 “본인의 탓도, 부모의 죄 때문에도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응답과 같다.
사치도 이런 말이 마음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기까지는 얼마만한 갈등과 번민, 의혹과 절망의 시간을 견디어야 했을까? 긴 이야기 짧게 하는데 는 적절한 시의 인용만한 것도 없다.
The Healing Time - Pesha Joyce Gertler
Finally
on my way to yes
I bump into
all the places
where I said no
to my life
all the untended wounds
the red and purple scars
those hieroglyphs of pain
carved into my skin,
my bones,
those coded messages
that send me down
the wrong street
again and again
where I find them
the old wounds
the old misdirections
and I lift them
one by one
close to my heart
and I say
holy
holy.
궁극적으로 나의 삶암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제껏 나의 삶이 아니라 부정하던 모든 곳에서 부딪히고 예상치 못했던 상처를 입어야 했다.
내 피부와 뼈에 새겨진
빨간색과 보라색 흉터
그 고통의 상형 문자가
뜻하는 메시지는
나를 아래로 보내
반복하여 잘못된 길로 가게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오래된 상처를 찾게되었고 길도 잘못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거기에 앉아 살아온 상흔들 하나 하나를 들어오려 가만히 속삭인다. 거룩하구나, 거룩하구나.
병이 깊어지면서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변해간다. 구체적인 어떤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치와 같이 아니면 신약성서의 ‘거룩한 수동태’ 와 같이 아니면 고난회 창립자인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말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서 직접 받은 것으로 여길 때만 가능한 시야가 생긴다. 그중에서도 4세부터 17세까지 나의 삶을 질곡으로 만들었던 사람에 대해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이 커진다. 그 사람도 삶이 많이 고단했고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