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삶이나 역사의 흐름에는 어떤 경향성이 있는 것 같다. 각 사람에게 어필하는 역사적 사건은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에, 포착하게 되는 경향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모델은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다. Spiral. 소용돌이치며 상하, 좌우, 전후로 움직이는 회오리바람. 회오리바람은 가끔 과거에 지났던 지점을 다시 지나지만 반복은 아니더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5~6세 때 나의 심정은 오늘도 계모에게 받을 온갖 핍박과 학대와 모욕을 예상하니 도무지 답이 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가출은 생각지도 못했을 테고! 후일 초교 4학년 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 맞고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져 현관 밖으로 쫒겨난 적이 있다. 그때도 집에서 기르던 개와 함께 정원에 웅크리고 앉아 “이러면서도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며 자기 분에 못 이겨 매질을 하는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떤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상처를 핥아주던 개를 쓰다듬으며 당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구차하게라도 살아야 하나?” 나이가 들고 만수산 드렁 칡같이 얽힌 인간관계의 한 면모나마 이해하게 되면서 그 계모도 나름 사연이 있었으리라 치부하고 흘려보낸다.
병이 깊어지면서 불면의 밤이 잦지만, 가끔씩 어렸을 적 새벽에 눈 떳을때의 그 심정이 재현된다. 잠자리에서도 잘 가누어지지 않는 몸으로 “오늘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옛날에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막막하기만 하지는 않다. 생명(生命) 이란 말을 나는 살라는 명령으로 새긴다. 창세기에 야훼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후 번성하라는 명을 내리신다. 그러기에 생명이란 먼저 저 좋을 때는 살고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아닌 일종의 의무인 것 같다. 진정한 평화는 투쟁 중에만 있듯이, 생명도 죽음의 위협에 노출될 때 의미가 새로워진다.
아브라함과 룻이 함께 살 수 없었던 이유는 서로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의 발병으로 우리 4 형제들은 조금씩 가난해진 것 같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