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토요일

by 언제나 posted Jun 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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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삶을 되돌아볼 때마다 세상에서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느껴집니다. 사실이지 제게 무슨 심각한 세상적인 걱정이 있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와 의료 혜택이나 노후 걱정도 없으며, 부모님들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 팔자가 정말이지 상팔자인데 왜 젊은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마도 제가 모르는 그 무슨 비밀을 세상 사람들은 알고 계시듯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르쳐 주시지 않는군요!!!

 

세상 참 공평하다는 말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 마다 각기 다른 걱정과 근심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려드는 게 인생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압박일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5,36) 나약하고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존적 한계로부터 근심과 불안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왜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주님은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Mt6,30)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며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데서 근심과 걱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며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근심과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을 붙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만큼, 의탁하는 만큼 자유의 폭은 정비례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때론 예기치 않은 시련이나 환난 그리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담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서 이러한 걱정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은 그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5,7) 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6,33) 찾고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매일 그리고 생애를 거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이며 명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명심하고 최우선적인 삶의 가치로 살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6,33) 그러니까 하느님의 모든 축복의 비밀은 이 짧은 말씀에 온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며 목표인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대의 일이 그대의 목적과 늘 일치하기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의도하는 일이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과 일치해서 살아간다면 매일의 삶이 분명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