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 저희 일곡동 명상의 집에는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봄의 전령사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진달래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란 말만 들어도 기쁨이 넘쳐나는 듯 느껴집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나나무스꾸리가 노래한 <사랑의 기쁨>은 노래 제목과는 달리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사랑의 양면성을 내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Jn15,9)고 천명闡明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 존재와 삶과 상관없이 먼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존재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합당한 존재이기에 사랑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란 <아버지와 당신>이 사랑으로 서로 안에 머물고, 함께 머묾을 통해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처럼 아버지와의 사랑 안에 머물고, 아버지와 하나됨(=친교와 합일)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신 겁니다. 초대한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라는 표현에 이미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였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랫말에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는 부분이 먼저 떠오릅니다. <사랑했었다.>는 고백은, 지금이 아닌 흘러간 어제의 시간에 멈추어 버린 사랑의 쓰라림을 표현한 듯 느껴집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곧 <마음에만 묻어두지 않고 말로 표현해야만 했던> 말이었지만, 표현하지 못한 뒤늦은 후회의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잖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너희를 사랑했었다.>라는 말씀은 끝나버린 사랑이 아니라 어제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랑해왔다는 의미이기에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읊조리다 보니 정말이지 마음이 미어져 옵니다.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지만, 이 사랑을 잊거나 잃어버린 채 살아 오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잃어버린 채 살아 온 우리를 사랑의 기쁨 곧 사랑받는 기쁨을 되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의 기쁨이 충만해지려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 기쁨은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서 얻는 기쁨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라는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머무시기에 얻은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는 이 부활의 기쁨은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있을 때,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항구하게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15,11) 사랑 안에 머무는 결실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며 복음의 기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1항에서’,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받는 기쁨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열린 마음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따랐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10,34)라는 고백을 듣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기뻐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5,16) 본디 사랑이 없는 <나>, 사랑할 줄 모르는 <나>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은 당신 사랑 안에서 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뽑으신 것입니다. 저의 선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저를 있는 그대로의 제 존재를 사랑하여 주셨기에, 그 사랑을 깨달아 이제 저도 세상에 나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면 살라>(15,12)고 재촉하십니다. 늦게야 님의 사랑을 알고 님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철부지와 같은 저를 끈질기게 사랑해 주셨기에 제 마음과 영혼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고 단언하시면서 이젠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며 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존재와 삶으로써 그 사랑을 보고 맛 들이게 하시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면 살아갈 때 나는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15,14)고 격려와 지지를 보내시면서 사랑하며 살도록 재촉하십니다. 이는 단지 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의 초대이며 호소이십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곧 우리의 존재 이유이고 축복이며 당신에게 대한 사랑의 응답이며 감사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여라>(15,17)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행하기 쉬운듯 싶지만, 실행하기 싶지 않은 말씀이고, 쉽게 실행할 수 있을 듯 싶지만 실행하기 무거운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무척이나 단순한 내용이지만 무척이나 깊고 심오한 말씀입니다. 예전 읽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엔,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는 부분이 참 좋다고만 생각했지,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지브란의 표현은,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 지난 제 삶을 되돌아보면 저의 삶은 함께 있으려고만 집착했지 거리를 두지 못했고, 함께 있으려고만 했지 숨쉴 수 있는 여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남을 사랑하기 이전에 제가 저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나 싶었고, <나>는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존재로 저 자신을 받아들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서 사랑받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게 무척이나 어설프고 어색하며 망설여질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게 무척 불편하고, 그래서 누군가의 호의와 사랑의 초대에 <아니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으며, 누군가의 말처럼 마음은 정으로 가득하나 표현할 줄 모르는 매정한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없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께서는 타인을 사랑하면 살아가도록 이 수도 생활과 수도자로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의 이유를 이제 새삼스럽게 느끼며 감사하며 살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서두에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자, 베드로는 황급히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사10,26)라고 말하고 행한 그 언행의 밑바닥에는 <예수님과 성령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지 서로 사랑하는 관계만 있을 뿐 누가 더 높고 낮음의 관계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려는 베드로의 진솔한 말과 행동을 배웁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Jn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