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요한 15, 9 ~ 17

by 이보나 posted May 08,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 저희 일곡동 명상의 집에는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봄의 전령사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진달래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란 말만 들어도 기쁨이 넘쳐나는 듯 느껴집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나나무스꾸리가 노래한 <사랑의 기쁨>은 노래 제목과는 달리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사랑의 양면성을 내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Jn15,9)고 천명闡明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 존재와 삶과 상관없이 먼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존재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합당한 존재이기에 사랑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란 <아버지와 당신>이 사랑으로 서로 안에 머물고, 함께 머묾을 통해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처럼 아버지와의 사랑 안에 머물고, 아버지와 하나됨(=친교와 합일)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신 겁니다. 초대한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라는 표현에 이미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였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랫말에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는 부분이 먼저 떠오릅니다. <사랑했었다.>는 고백은, 지금이 아닌 흘러간 어제의 시간에 멈추어 버린 사랑의 쓰라림을 표현한 듯 느껴집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곧 <마음에만 묻어두지 않고 말로 표현해야만 했던> 말이었지만, 표현하지 못한 뒤늦은 후회의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잖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너희를 사랑했었다.>라는 말씀은 끝나버린 사랑이 아니라 어제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랑해왔다는 의미이기에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읊조리다 보니 정말이지 마음이 미어져 옵니다.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지만, 이 사랑을 잊거나 잃어버린 채 살아 오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잃어버린 채 살아 온 우리를 사랑의 기쁨 곧 사랑받는 기쁨을 되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의 기쁨이 충만해지려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 기쁨은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서 얻는 기쁨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라는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머무시기에 얻은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는 이 부활의 기쁨은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있을 때,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항구하게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15,11) 사랑 안에 머무는 결실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며 복음의 기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1항에서’,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받는 기쁨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열린 마음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따랐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10,34)라는 고백을 듣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기뻐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5,16) 본디 사랑이 없는 <나>, 사랑할 줄 모르는 <나>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은 당신 사랑 안에서 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뽑으신 것입니다. 저의 선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저를 있는 그대로의 제 존재를 사랑하여 주셨기에, 그 사랑을 깨달아 이제 저도 세상에 나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면 살라>(15,12)고 재촉하십니다. 늦게야 님의 사랑을 알고 님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철부지와 같은 저를 끈질기게 사랑해 주셨기에 제 마음과 영혼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고 단언하시면서 이젠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며 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존재와 삶으로써 그 사랑을 보고 맛 들이게 하시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면 살아갈 때 나는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15,14)고 격려와 지지를 보내시면서 사랑하며 살도록 재촉하십니다. 이는 단지 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의 초대이며 호소이십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곧 우리의 존재 이유이고 축복이며 당신에게 대한 사랑의 응답이며 감사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여라>(15,17)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행하기 쉬운듯 싶지만, 실행하기 싶지 않은 말씀이고, 쉽게 실행할 수 있을 듯 싶지만 실행하기 무거운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무척이나 단순한 내용이지만 무척이나 깊고 심오한 말씀입니다. 예전 읽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엔,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는 부분이 참 좋다고만 생각했지,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지브란의 표현은,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 지난 제 삶을 되돌아보면 저의 삶은 함께 있으려고만 집착했지 거리를 두지 못했고, 함께 있으려고만 했지 숨쉴 수 있는 여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남을 사랑하기 이전에 제가 저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나 싶었고, <나>는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존재로 저 자신을 받아들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서 사랑받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게 무척이나 어설프고 어색하며 망설여질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게 무척 불편하고, 그래서 누군가의 호의와 사랑의 초대에 <아니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으며, 누군가의 말처럼 마음은 정으로 가득하나 표현할 줄 모르는 매정한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없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께서는 타인을 사랑하면 살아가도록 이 수도 생활과 수도자로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의 이유를 이제 새삼스럽게 느끼며 감사하며 살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서두에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자, 베드로는 황급히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사10,26)라고 말하고 행한 그 언행의 밑바닥에는 <예수님과 성령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지 서로 사랑하는 관계만 있을 뿐 누가 더 높고 낮음의 관계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려는 베드로의 진솔한 말과 행동을 배웁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Jn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