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11.17 08:48

연중 제3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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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전례력은 대림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연중 제33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냈지만,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도입하기를 바라시면서, <전 세계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더없이 훌륭한 구체적 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선언하셨기에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변경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2017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의 교종의 담화 주제는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Jn3,18)를 말씀을 바탕으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 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아울러 제2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인 작년의 당화에서는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셨다.>(시34,7)는 말씀을 바탕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양한 형태의 빈곤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이 필요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하느님의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권고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서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87항에서)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의 취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저는 가끔 여행 에세이를 즐겨 읽기도 한데. 그 중에서도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좋아하며 추천하고 싶다고 말한 책인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었었죠. 이 책은 여타의 여행 에세이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 책은 세계의 11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에세이인데, 이 장소들을 관통하는 표제어(key word)가 <폐허>입니다. 이 책의 몇 대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고대 유적에서 배우는 가장 간단한 교훈은, 뭐든 수직으로 세운 것은(생략) 훗날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수평적인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생략) 언젠가는 남은 유적들이 모두 사라져 사막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평선을 방해하는 수직 기둥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공간의 최후의 승리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지적인 훈련과 야망들이, 심드렁했던 나태함 그리고 실망감 때문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 나에게는 목적도 방향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삼십 대 때보다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 것, 나 스스로 빠른 속도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인용한 이 대목은 작가인 다이어를 여행으로 이끈 것이 바깥의 폐허일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폐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폐허는 과거를 떠오르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보는 이를 미래로 안내하죠. 거의 어떤 예언 같은 느낌입니다.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 될 거라는 예언이요. 미래는 늘 이런 모습으로 끝났습니다.>라는 부분에 도달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의 안팎의 폐허와 화해를 꾀하도록 초대합니다.

안식년 동안 북 유럽(스칸디나비아 3국)과 남 유럽(스페인과 포르투칼)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은 성전의 외부의 크기보다 내부의 화려함과 소박함의 차이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후 조건의 차이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그 보다는 북 유럽의 교회들은 대부분이 루터 교회였고, 남 유럽은 모두 가톨릭 교회(=항해 시대의 부를 누린 국가)였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정말이지 남 유럽의 내부는 화려함과 함께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Lk21,5~19)의 도입부에, 몇몇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라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이미 미카, 예레미야, 에젤키엘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 있었으며,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전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재건된 제2성전을 두고 하는 말씀이며, 기원 전 19년부터 헤로데 왕에 의해 확장되어 예전 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로마군은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전파괴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제2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부분은 오직 서쪽 벽(통곡의 벽)의 일부로서, 지금도 유대인들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복구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자 그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21,7)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21,8)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부의 요지는 결국, <내가 그리스도다.>고 선언하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조선 말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와 위기 속에서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자처하는 사이비 교주와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떠벌리는 인간은 늘 있어왔었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예수와 그리스도 그리고 거짓 메시아가 누구인지 식별할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표징들, 곧 <민족과 민족 간에, 나라와 나라 간에 전쟁;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박해와 미움 등>을 언급하셨으며, 사실로 지난 2,000년 동안 이 모든 일이 거듭거듭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직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참된 신앙인은 그 때가 언제인지 어떤 표징이 일어날 것인지 관심하기보다 다만 지금 주어진 현실을 깨어 살면서 자신다움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된 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묵시문학이 전하는 종말은 이미 왔기에 갈팡질팡, 우왕좌왕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삶의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당신의 참다운 미래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앙인인 저희가 주인으로 행세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지 않고 미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 날은 더디 오려니 하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자기 할 바를 다하는 사람답게>(2테3,11.12참조) 살라는 권고를 마음에 새기면서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 조건이 고통스럽고 암울 할지라도, 자신의 삶에서 부대끼는 조건이 어둡게 보이고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희망과 기쁨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때론 세상에서 하느님의 미래를 앞당겨 살다보면 <더러는 죽음을, 더러는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는 말씀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미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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