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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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달리 성서학의 발전으로 영성의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성서적 영성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접근 방식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어쩌면 그 해답은 근본적인 영성의 회복에 있다고 봅니다.

 

<근본적인>(=정치적으로 사용하면 급진적인 것으로 진보적인 좌파와 동일시될 위험이 있다.)이라는 말의 본뜻은 이 단어의 어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 radix 또는 radicus(=radical)는 본디 <뿌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접근이란 표면을 파헤치고 그 아래에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뿌리까지 내려가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그것은 <사물의 근본 혹은 근원에 가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대어는 <피상적> 또는 <천박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접근 방식은 표면적인 인상에 만족하지 않고 문제의 핵심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可視的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은 것, 비가시적 것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성사적인 바라봄이며 마음의 눈뜸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영성의 접근이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빈 집의 위험성>을 경고하셨지요. 즉 우리가 집 앞의 모든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일곱 마귀는 우리의 뒤에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마태 12, 43~45) 새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가 <우리는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신다.>에서 말한 뜻은 결국 우리의 영적 양식, 음료는 우리가 살고 있고, 일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솟아난다는 것이며, 우리의 영적 순례는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바로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서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네 삶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영성 생활이란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데 있습니다.

 

전인적인 영성, 그리스도의 추종의 영성의 밑뿌리는 성경이며, 성경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기초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죠르나멘또, 원천에로 되돌아감의 밑뿌리입니다. 곧 되돌아간다는 의미는,

(1) 이방인이란 자각과 체험입니다. 지금 우리는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낯선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번뇌로 인해 심한 갈등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겪은 상황을 표현한 시편이 바로 137장입니다. <낯선 땅에서 어찌 하느님께 노래 부를 수 있으랴!> 낯선 땅은 불의와 죽음이 판치는 땅입니다. 낯선 땅은 착취와 억압의 땅이기도 합니다. 낯선 땅처럼 우리 안에서 본래적인 것의 상실이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느끼는 점은, 성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처럼 어떤 누구도 참된 안식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 낙원으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회귀 본능이라 하는데, 회귀 본능은 인간만이 아니라 연어와 팽귄에게도 있으며, 이를 깨닫고 자각할 때 떠나 온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낯선 곳은 끊임없는 생명의 유혹과 고뇌가 있기에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일어납니다. 본향으로 되돌아가 싶은 마음의 병이 바로 향수병입니다.

(3) 되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해 참된 자신(거짓된 자아ego에서 참된 자신 self)에로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래적인 참된 자신을 잃어왔으며, 자기 자신 밖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의 귀향은 우리 자신의 되돌아감의 참된 표상입니다. Metanoia(회개)는 사랑이신, 인간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잃어버린 참된 자신의 회복이며 되돌아감입니다. 本來面目의 回復!

 

이처럼 분리와 상실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되돌아감의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또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깊이 있게 직관할 때 되돌아가야 할 확신과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르게 됩니다. 영적 순례를 통해 되돌아가야 할 우리 삶의 원천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변형하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말하여진 것을 실제로 일어나게 합니다. 즉 말하는 것은 실행되며 성취됩니다.

- 시편 33, 9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생겨났기

때문이다.>

- 말씀하시자 구원되었으며, /치유되고 변화 되었습니다.(=자캐오처럼)

 

그런데 하느님은 창조 역사를 통해 말씀하셨으며 자연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큰 성서와 같습니다. 통상적으로 하느님은 사물-사건-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이제는 그분의 언행을 기록한 성서를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며, 이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영감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마치 우리의 호흡이 발성된 말을 운반하듯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호흡이시다.> 여기에는 입김이신 성령의 작용 없이는 있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의 입김(숨, 얼)입니다. 성사적 입김으로써 거룩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적 말씀의 성사적 특은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성취된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며, 십자가 상에서의 말씀은 극단적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 사랑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취된 말씀은 때론 상징적인 중재를 통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전례 거행 안에서, 성경이 낭독된 순간은 구원적인 그리스도의 사건의 현재적 실현입니 다.

* 말씀은 글자를 넘어 사건을, 사건을 넘어 인격을 만나야 합니다.

 

이 모든 중재를 통하여 우리는 실제로 말씀을 듣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건 곧 파스카 사건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사로서의 성경에 접근할 수 있는가? 이는 영적 독서(성독)의 실천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의 3가지 전통적 접근 방법 (Louis Bouyer의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1) 학구적 독서 (Studious Reading) - 역사 비평적 방법론

텍스트의 자의적 의미 발견/ 정확한 정보 획득

자의적(정확한) -은유적(신앙의 깊은 내용) - 도덕적(비유적 해석) -

종말론적 해석(미래 현실) - 성사적 해석

◆약점: 지나치게 텍스트에 의존함으로써 텍스트 안에 포장된 인상적인 면만을 강 조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보다 넓게 깊게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법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성경 말씀을 듣고도 독자는 각기 다른 의미(=생각이나 느낌 등)를 얻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자의 성향, 삶의 자리, 상황에 따른 다양한 질문, 걱정, 관심을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해답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나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2) 지속적 독서(Lectio Continua) - 전례 안에서의 계속적인 독서 방법

* 단어 해설 lectio는 legere (모으다-필요한 것을 선택하다-눈으로 모아들이다.)에서 유래한 명사형입니다. 이로써 독서의 내용과 대상을 의미합니다.

◢ 구원의 모든 역사를 통괄해서 일목요연하게 독자들을 독서에 잠기게 한다.

◢ 좋은 소설책처럼 성서를 계속해서 읽어가는 방법이다.

◢ 현행 독서는 3년을 주기로 하고 있다. (가나다해—부활시기는 요한 복음을

집중적으로 읽음)

 

3) 성독(Lectio Divina)

목표: 하느님을 추구 + 하느님과 친밀

성독은 기도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머물기 위해서이다.

 

성독(=영적 독서)은 성경과 함께하는 독서 방법입니다. 즉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발타살은 기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기도는 소통, 대화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는 단순히 듣는 것이다. 그때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배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역시 <너 자신의 고독에로 들어가라. 홀로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와 함께 말하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바라볼 수 있으며, 그것에 접하여 영원한 진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여하한 심리적인 기능과 역할의 구체적인 정지를, 멈춤을 의미합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우리를 타자와의 합일에로 이끌고, 초월적 신비와 함께 머물게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친밀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이상으로 하느님은 우리와의 친밀을 더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증여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개방합니다.

 

헨리 뉴웬은 그의 저서 <발돋움하는 사람들, 147~148쪽>에서 말씀의 개인화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 학문적 성향의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토론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묵상과 명상을 요구한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떼어서 보지 말고 그것을 통째로 마음속에 받아들이며 그 말씀이 내 생각과 같은가 틀린가를 따지지 말고 어느 말씀이 내게 직접 하시는 말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 말씀을 어떤 흥미 있는 대화나 논문 주제로 여기지 말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의 가장 내밀한 구석으로 스며들어 오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기름진 땅에 떨어진 씨처럼 말씀이 열매를 맺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듣고 깨닫게’(마태 13, 23)된다.>

 

우리는 <마음이 나뉘게 하는 삶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온전하게 말씀이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식사하는 동안,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루카10, 38~42) 우리도 마르타처럼 우리가 지금 만나고 계시는 그분에게서 시선을 떼어 온갖 준비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릴 수 있습니다. 주님 발아래 앉는 편을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발 아래가 바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이며, 우리가 하고 있는 <많은 일이 한 가지 필요한 일>에 굴복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삶의 <많은 일>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고 그분과 친교, 친밀한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친교와 교제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 생활은 반찬과 양념 접시만 두루 갖춘 뷔페 식사와 같습니다.

 

 

2. 기도의 현상학적 접근 : 기도를 위한 근본적 준비와 근접적 준비

 

1) 육체적: 기능적 준비 (육신: 호흡 + 정신: 자세의 처리)

➀ 호흡 집중은 우리의 마음을 침잠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보조 수단입니다. 호흡의 자각은 우주의 근본적 리듬에 조화하는 것입니다.

- Form Donation + Form Reception

- 호흡 들이 쉬기(들숨)은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킵니다. (Inspiration)

- 호흡 내 쉬기(날숨)은 우리에게 향상심의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Aspiration)

 

이와 같은 호흡의 상징적인 움직임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당신의 말씀으로 창조물에 입김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들숨은 우주 안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거듭 확인하는 성령의 작용이며, 날숨은 성령의 입김을 통하여 예수 안에서 아빠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단련 가운데서 호흡 단련은 단순한 작용이 아니라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 자신의 호흡의 리듬을 자각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올바른 들숨과 날숨은 마음의 정관靜觀에 이르게 합니다.

 

* 그리스도교적 호흡법은 일반적인 기수련 혹은 선에서 말하는 단지 에너지, 氣의 작용보다 훨씬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우주에는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은총이 있으며,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에 순응하고 수용하는 신앙적인 동작이며 단련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호흡법입니다. 물론 외적인 수련 방법을 차용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그 호흡법에 몰입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호흡법이 곧 기도는 아닙니다만 기도를 위한 가장 적합한 통로이며 준비 자세입니다. 그러기에 호흡을 하면서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16, 28)는 말씀을 의식하면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들숨은 <하느님 사랑의 영>을 들이마시는 것이며, 날숨은 이 사랑을 세상을 향해 내어놓은 것과 같다. 기도와 사랑의 조화요 균형이 필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➁ 자세는 호흡과 달리 정신적인 작용입니다. 기도하는 자세는 통상적으로, 경험적으로 보면, 육체적인 측면인 호흡법과 상관관계가 깊습니다. 자세는 편안한 호흡을 돕고자 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자신에게 무리한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자신의 신체조건에, 혹은 상황에 적합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대 데레사 성녀의 표현처럼 자세는 편안하게 그러나 너무 편해서는 자칫 기도에 전심전력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편한 자세는 쉽게 잠들게 됩니다. 흔히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혹은 다른 사람의 기도 자세가 멋있게 보여서 어떤 자세를 모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자세는 자신의 신체나 정신의 조화를 깨트릴 수 있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기도의 자세는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자세를 익히면 좋습니다. 예전 저는 바닥에 반가부좌를, 지금은 좌골신경통으로 말미암아 의자에 앉아 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한때 달라진 호흡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모든 자세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이며,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하는 자세는 하느님을 향한 개방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무릎 꿇음은 겸손 - 앉기는 친밀감을, -서서 하기는 찬미와 감사의 자세를 그리고 누워 부복하는 기도는 봉헌을 의미합니다. (=사제서품이나 종신 서원식에서 자주 볾, 때론 피정의 집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분을 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할 때는 조심하고 주의하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혼자 밤중에 기도할 때야 괜찮겠지요.)

 

다시금 강조하지만 자세는 신체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와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자세는 허리를 곧추세우는 것이 일반적으로 좋습니다.

 

◑ 앉는 자세: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

1) 가부좌

이 자세는 매우 안정된 자세이나 이러한 자세는 다리가 길고 허벅지와 장단지에 살이 없는 인도인의 체형에 어울립니다. 이를 위해서 오랜 단련이 필요합니다.

2) 반가부좌

3) 완가부좌: 이 자세는 비교적 편안하나 허리를 바로 세우기 힘든 단점이 있 습니다.

 

◑ 방석이나 잔괘틀을 사용

◑ 의자 사용

 

몸으로 하는 자세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표현,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조화를 드러냅니다. 기도할 때 몸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에서(* 불교의 좌선, 단학, 기공의 수행 방법)에서도 육체와 정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정신과 신체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에 내적인 상태가 몸의 자세나 몸짓으로, 종종 무의식적으로 표현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신체의 각 부분을 예민하게 의식하다 보면 내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더 잘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내면 상태를 자각하게 되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형태의 기도가 가장 좋은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되면서 기도에 대해 바람직한 방향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피곤하든지 활기에 넘쳐 있든지, 바쁘게 일하고 있든지 느긋하게 쉬고 있든지, 고민에 빠져 있든지 마음이 평온하든지 하는 상태는 틀림없이 기도 자세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지금 가장 적합한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기도를 집중하기 위해서 신체적 상태나 심리적 상태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피곤할 때는 기도 역시 집중하기 어렵고, 역시 심리적인 불안과 많은 걱정이나 고민이 있을 때 몸 또한 따라주지 않을뿐더러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기도할 때 몸은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앉아 있기,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리기, 성령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손바닥을 위로 향하기, 슬픔. 피로. 좌절을 눈물로 호소하기 등은 몸을 통해 느낌을 표현해 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성철 스님께서 자신을 만나러 오는 분들에게 권하는 1000배는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삼일 전례 중 저희 수도회에서 실시한 한 가지 예는, 십자가의 길 묵상 시, 각처에서 큰 절을 3번씩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몸으로 기도하는 방법 중, 한가지 실례입니다.

 

흔히 사람과 대화할 때 여러분은 어떤 자세를 취하시나요? 상대방이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그 사람의 말에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집어넣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영과 영이 만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에서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영은 우리 몸속에 있기에 우리의 몸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관상기도를 위해 먼저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고 영적 스승들은 권유합니다. 내 몸을 고요히 가라앉혀야 합니다. 몸과 숨결과 마음을 조화시킬 때 참자기를 만나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 통상적으로 불교에서 권하는 자신의 몸을 고요히 가라앉히기 위해서

▶ 앉아라. 우뚝 솟은 산처럼 앉아라. 똑바로 앉아라. 혈액순환이 잘 되는 자세로 앉고 정신 집중이 가장 잘 될 수 있는 자세가 가부좌 다리로 앉는 것입니다. 벌을 받는 자세로 앉는 것이 아니다.

▶ 입을 다물고 혀는 윗 이와 잇몸이 맞닿은 곳에 살짝 올려놓아라.

▶ 시선은 1미터 거리 선위에 평안히 놓고 쉬어라. 눈을 내리 뜨기보다 살며시 쳐다보되 초점을 찍지 말고 그냥 그 주위에 시선을 두어라. 필요하면 눈을

뜨거나 감을 수도 있습니다.

▶ 손가락을 엄지손가락과 맞부딪히게 하고 왼손은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포개어 배 밑에 가부좌 다리 위에 올려놓아라. 엄지손가락 두 개가 서로 물고 있을 때 는 졸지도 분심도 없이 집중된 상태이다. 손가락 맞부딪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 다. 엄지손가락이 떨어지면 분심이아 졸음으로 자신이 흐트러져 있음을 의식 하고 곧바로 엄지손가락을 부쳐라.

▶ 허리는 완전히 곧추 세우도록 하라.

▶ 의자를 사용할 시에는 허리를 기대지 말고 앉아라.

▶ 어깨, 얼굴, 몸의 의식을 하면서 긴장을 풀어라.

▶ 숨쉬기이다. 숨을 쉬되 정상적인 숨쉬기이다.

 

2) 초월적 준비: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을 청하는 기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거룩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구원)의 사건, 인격과의 만남 체험을 위해 필요합니다. 단지 시작 기도라는 형식이 아닌 말씀과 말씀하시는 그분의 현존 앞에서 신앙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향한 기도의 열망을, 영감을 청하기 위해서 초월적 차원에서 준비 요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신앙: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신앙의 행위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 행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합 일을 인격 안에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기 저와 함께 현존하시는 당신을 믿나이다.>

◆ 상상력: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 체험은 하느님 앞에 서 사랑스럽게 그리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공상을 위한 사고의 상상이 아니라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관상을 위한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 개방성: 기도 안에서는 철저한 자기 의탁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자기 찢음과 열어 보임이 그러기에 중요합니다.

◆ 청원: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이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기도를 가르쳐 주 시도록 간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용서:

➀ 진리를 기억하고 진리를 대면(자신의 상처의 원인을 이해하고 파악하라!)

하기 위해서입니다.

➁ 용서를 베풀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포기와 의탁의 신비입니다.

➂ 잊어라: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기도는 용서입니다. 기도가 하느님과 관계라면, 이웃을 통해 하 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해서는 하느님과 결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고 이웃을 판단하지 않으며 용서할 때 내적 평화를 이루며 화 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 안내 4. 호흡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흔히 직관 기도와 신심 기도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각 사람마다 자기에게 적합한 기도 형태가 있습니다. 혹은 같은 사람이라도 필요에 따라서 어떤 때는 어떤 기도 양식이 다른 기도 양식보다 훨씬 적합하게 느껴 질 때도 있습니다.

 

신심 기도 역시 마음의 기도라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지성만 사용하는 기도라면, 그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기껏해야 기도의 준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있어서도 적어도 조금이라도 마음을 통한 의사소통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고, 조금도 감정적 요소가 들어 있지않는 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대화에서 즉 생각을 나눌 때, 감정이라고는 전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대화라면 분명 그 대화에는 절친한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그런 나눔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쉽게 신심적 기도에서 직관적 기도 즉, 마음에서 마음에로 옮겨갈 수가 있는 기도 방법을 실행해 보도록 합시다.

 

잠시 호흡을 의식하십시오.

 

이제 자신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이 분위기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해 보십시오.

숨 쉬고 있는 공기 속에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에 공기 속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알아차리십시오.

 

자기가 숨 쉬고 있는 공기 안에 그분이 계심을 의식했을 때에 무엇을 느끼게 되는지 유의하십시오.

 

이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표현해 보십시오. 그러나 말없이 표현하십시오. 어떤 때는 쳐다보는 눈길이나 가벼운 몸짓을 통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자기의 여러 감정들을 말로써가 아니라 호흡을 통해서 표현해 보십시오.

 

우선 그분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감정을 표현해 보십시오.

머릿속으로조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다만 숨 쉬는 방법을 통해서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하고 이야기하십시오. 이 감정을 심호흡하면서 숨을 더욱 깊이 들이마시면서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태도나 감정을 표현해 보십시오. 신뢰하며 자기를 내맡기는 표현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숨 쉬는 방법을 통해서 그분께 “나의 하느님, 나를 당신께 온전히 맡기나이다” 하고 이야기하십시오. 이것을 숨을 내쉬는 데에 더 힘을 줌으로써, 마치 깊이 한 숨이라도 쉬는 듯이 매번 숨을 내쉬면서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내맡기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이제 자기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다른 느낌들을 잘 생각해보고 이것들을 호흡을 통해서 표현해 보십시오. 사랑, 가깝고 친밀한 느낌, 흠숭, 감사, 찬미...

 

이렇게 하는 것이 피곤해지거든, 이 활동에서 맨 처음에 했듯이 그냥 자기 주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의식하면서, 또는 숨을 들이 쉬고 내쉬는 공기 속에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평화롭게 쉬십시오. 그러다 분심이 들 것 같으면, 다시 한번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말없이 표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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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학교 강의 5: 하느님 말씀과 기도의 기본 구조 이보나 2021.08.12 238
417 연중 제19주일 : 요한 6, 41 - 51 이보나 2021.08.08 151
416 기도 안내 3. 호흡 감각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이보나 2021.08.05 236
415 연중 제18주일 <탈16,2-4,12-15/에4,17-24; 요한 6, 24 – 35> 이보나 2021.07.31 135
414 기도학교 강의 3: 침묵과 들음 이보나 2021.07.29 256
413 연중 제17주일 <2열4,42~44/에4,1~6: 요한 6, 1 ~ 15> 이보나 2021.07.24 133
412 기도학교 강의 2: 기도하는 존재와 기도하는 삶 이보나 2021.07.22 233
411 연중 제16주일 마르코 6, 30 ~ 34 이보나 2021.07.17 179
410 기도학교 강의 1: 입문과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체험 이보나 2021.07.15 215
409 연중 제15주일 마르코 6, 7 ~ 13 이보나 2021.07.11 182
408 연중 제14주일 마르코 6, 1 ~ 6 이보나 2021.07.03 176
407 연중 제13주일 마르코 5, 21 ~ 43 이보나 2021.06.26 204
406 연중 제12주일 마르코 4, 35 ~ 31 이보나 2021.06.19 163
405 연중 제11주일 마르코 4, 26 ~ 34 이보나 2021.06.12 196
404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시편 22장을 통해서 본 사제란 누구인가? 이보나 2021.06.10 315
403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마르꼬 14, 12-16. 22~26 이보나 2021.06.05 176
402 성체 생활과 치유 그리고 그 영성 : 강의 3 성체 안에 사랑의 삶 이보나 2021.06.03 291
40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마테오 28, 16 ~ 20 이보나 2021.05.29 195
400 성체 생활과 치유 그리고 그 영성 : 강의 2 성체를 통한 치유 이보나 2021.05.27 294
399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 19 ~ 23 이보나 2021.05.22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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