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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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8, 35)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18,21)라는 질문은 이미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일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고 번번이 나에게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상처와 아픔 그리고 손실을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무자비한 종처럼 임금, 곧 하느님에게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현재 모습을 봅니다. 그러기에 임금은 무자비한 그 작자에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18,33)라고 호통을 치시며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분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더 이상 과거의 잘못과 죄의 무게로 불행하게 살지 말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감옥에 갇힌 바로 자신을 풀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는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참된 자기 사랑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18,22)라고 당부하셨는데 살아오면서 우리는 어쩌면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강변의 모래알만큼 셈할 수 없는 용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에 힘입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어쩌면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하느님과 인간 마음의 크기 곧 용서의 크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조건과 단서, 회수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가장 극단적인 차이 곧 하느님다운 모습은 어쩌면 용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신의 전능을 용서와 자비로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비유가 바로 오늘 복음 이야기입니다. 복음에서 제시한 만 탈렌트는 지금의 화폐단위로 말하자면 천문학적인 숫자이며 인간으로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이며, 이는 결국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의 용서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형편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아드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인간을 재창조하셨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를 용서하며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한 조건이며 단서입니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만, 그 용서는 늘 조건과 단서 그리고 회수가 붙은 용서이기에 동일한 잘못을 반복할 때까지 유효한 조건부적인 용서이며 집행유예와 같은 한시적인 용서입니다. 또한 인간은 마음의 크기가 작기에 자신에게 잘못한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계산하며 다시 반복했을 때는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며 가중처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렇듯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함에 있어서는 무서울 만큼 참으로 무자비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의 종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베풀며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효경孝敬이며 공동체 생활의 미덕입니다. 스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공동체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존재로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용서의 최절정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다음 기도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23,34)라고 기도하심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본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주신 용서를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이며, 우리의 용서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나약한 존재이고, 함께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분은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바람을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왜 하느님께서 인간을 홀로 살지 않게 하고, 함께 더불어 존재하게 했는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봅니다. 빈대가 무섭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 없듯이,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혼자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뜻에도 반하고, 삶의 참된 이유나 의미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행동이며 마음가짐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상처는 서로 사랑하기에 겪는 아픔이며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묶인 가족이며 형제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는 곧 용서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바람 때문에 오히려 더 용서가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인생이며 공동체 생활의 신비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18장은 공동생활에 관한 하늘나라의 헌법 혹 가훈家訓과도 같으며, 18장의 주된 흐름은 죄와 용서이며 결론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쉬울 것 같으면서도, 막상 용서해야 할 처지가 되어 보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 중 한 가지가 바로 용서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베풀고 살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도록 바라시는 것은 용서해야 할 사람, 즉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안긴 그 사람보다 용서해야 하는 자기의 행복과 건강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갈 때 영혼이 파멸되어 가기에 죽어가는 존재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기보다 용서해야 하는 본인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은 신적인 사랑과 능력을 바탕으로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받은 은총의 체험이 전제될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에는 인간의 몫과 하느님의 몫이 있는데, 인간은 다만 느낌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의지로 용서할 뿐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잠재된 느낌까지 용서할 수 있도록 기억의 치유와 내적 평화를 받고서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느낌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용서하신 분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용서를 바탕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내 형제자매를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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