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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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둘러 보다 책 제목이 특별해서 잠시 짬을 내어 <솔직함의 적정선>(백두리)을 보고 읽으면서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저 자신은 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ME발표 중에), 저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때론 이 솔직함이 저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저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으로 다가왔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함의 적정선은 도대체 어디까지 일까요? 인상적인 부분은, <감추는 것이 많으면 더 알고 싶어지지만, 거짓된 것이 많으면 더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진짜를 듣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만 듣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함의 적정선을 찾는 것은 마치 봄 옷차림을 고르는 것과 같이 이 거다 싶은 조건이란 없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봄 마다 옷장을 보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하지, 이 날씨에 뭐가 적당한 거야?”

 

오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사실 헷갈린 부분도 없지 않지만, 오늘 복음에 의하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Jn1,45)는 이 부분의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는 동일 인물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자신이 만난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나타나엘에게 소개하자, 대뜸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라고 거침없이 응답합니다. 이 표현의 밑바닥에는 나타나엘의 고정관념, 선입견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나타나엘처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길들여 있다 보면, 위대한 인물은 예루살렘이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베틀레험 출신이면 몰라도 나자렛과 같은 변두리, 시골 촌 동네에서 세상을 구할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1,45),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일단 한번 가서 보게.>라고 설득하여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나타나엘을 향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1,47)라고 좋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이 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는 것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라고 느껴집니다.
 
예상하지 않은 예수님의 찬사를 듣고 나타나엘은 내심으로 놀랍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오면서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을 처음 본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을 들으면서 내심 놀람과 함께 호기심이 발동하여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1,48)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단지 나타나엘 만의 물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 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오래도록 나타나엘 자신이 스스로에게 묻고 물어 왔던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1.48)고 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보았다.’는 표현은  마치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 마테오 사도를 부르실 때처럼 단지 눈에 보이기에 보는 것이 아니라 주시해서 그를 보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마음에 무엇으로 고민하고 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 각자를 주시해서 보고 계시며 당신과 만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장소는 곧 나타나엘이 이스라엘의 깨어 기다리는 사람의 전형으로 평소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해 온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근거는 바로 시편 1장의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1,2)는 노래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처럼 그 곳이 어디든 하느님을 갈망하고 고대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늘 지켜보시고 당신에게 다가 올 것을 기다리십니다. 저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아닌 누이의 무덤 옆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참 생명과 진리를 기다려 왔었기에 나타나엘은 마침내 주님과 만남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남은 분명 은총이며 그러기에 은총 중의 은총의 만남은 주님과 만남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마침내 너무도 가까이 자신이 기다려온 메시아를 만났음을 확신한 나타나엘은 그의 솔직한 성격처럼 즉각 단순 명료하게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진리 앞에 단순소박하게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주님을 따랐던 나타나엘과 같은 제자와 사도들을 예수님은 기다려 왔었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비록 당신과 당신 고향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그였지만 그렇게 적나라하며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것이 때론 그의 약점이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분명하고 솔직한 성격이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솔직한 사람은 담백하기에 한번 마음이 바뀌면 무섭게 누구에게나,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맡길 여지가 충분한 성향의 사람들입니다. 이를 계기로 나타나엘은 아마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곡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1,50)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솔직함은 분명 좋은 미덕일 수 있지만 때론 그 솔직함이 거부 당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게 되고 그렇게 살다보면 자신 앞에 정직하지 못하게 되고 내적 평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 앞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으로 남게 되면 자칫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서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거짓된 허위와 가식을 벗어 던져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솔직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우리를 당신처럼 <거짓 없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가서 저와 함께 주님을 만나 봅시다.>고 재촉하고 초대합니다. <스승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