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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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5,34)

“사랑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라.”는 돈 보스코 성인의 이 말씀을 저는 참으로 좋아합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살짜리 회당장의 딸과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를 중첩해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든 체면과 위신, 명성과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을 뵙고 무릎을 꿇은 채,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5,23)라고 간절하게 간청하였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장애 혹은 병든 자녀를 둔 부모의 절박한 심정일 것이며, 이런 절박한 마음과 함께 자기 딸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은 바람과 자신의 희망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에서 예수님께 그토록 간절하게 청하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깊은 믿음을 보시고 그 회당장의 집으로 길을 잡은 예수님께 회당장과 달리 선뜻 나설 수 없는 딱한 처지와 신분이었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자는 다만 뒤로 가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5,28)라고 믿고 주님의 옷을 만진 순간,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5,29) 고 기록합니다. 믿는 만큼 받는다, 는 말처럼 그녀는 비록 회당장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처지도 아니었기에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나을 것이라는 그 믿음대로 치유를 받는 순간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자비와 은혜를 체험한 순간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온 말은 무엇이었으며, 그녀의 속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는 단지 그 여자만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적 사랑을 체험하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향한 하느님의 은혜이며 사랑의 발로입니다. 사실 그녀는 열두 해 동안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용하다는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하였고, 시간도 재물도 다 쏟아부었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이 도리어 상태가 더 나빠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에게서마저도 버림을 받았을 만큼 불쌍하고 가련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다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기에 마치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자 하는 심정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마지막 희망으로 군중 속에 숨어 살며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이 나은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뭐라고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흔히 알고 하는 말 곧 바닥을 쳐야 한다, 는 우리네 인생의 경험처럼 밑바닥까지 내려가야지만 다시 솟아오를 수 있는 것이 신앙인가 봅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또 비워야 만이 채워질 수 있나 봅니다. 어설프게 죽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나 봅니다. 하혈병을 앓아왔던 여인은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모든 것을 잃었고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5,28)라는 처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그녀가 생각하던 대로, 믿는 대로 이루어 진다, 는 말처럼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누군가가 자기 옷에 손을 대고 치유의 힘이 뻗어나감을 직감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5,30)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옷을 누구나 만진다고 해서 치료가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단지 옷을 만진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손을 믿음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누구나 성체를 모시지만 믿음으로 모신 사람만이 그 성체의 힘을 느낄 수 있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5,34)

하혈병을 앓은 여인의 치유로 시간이 지연된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따님이 죽었으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5,35)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주저하며 망설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5,36)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야이로에게 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말한다. 일어나라!” (5,41) 고 하자 그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그 소녀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였으며, 소녀의 치유는 하느님 사랑의 드러남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회당장과 하혈병을 앓았던 여자는 많은 점에서 대비되면서도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남성-여성, 깨끗함-더러움, 이스라엘인-이방인, 가진 자-없는 자, 딸을 위해- 본인을 위해, 앞에 나서서-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바라는 바를 표현하였지만, 그들에게서 공통된 점은 바로 자신들의 처지에서 솟아나는 절박한 심정과 그리고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표현한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심한 중병을 앓고 있는 딸을 둔 회당장과 그 여자는 어둡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고, 자신들이 믿는 바를 주님만이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의탁했다, 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고 구원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아왔던 그녀에게 하신 말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5,34) 는 말씀 안에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구원이란 결국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신체적으로 건강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평안과 평화를 누리게 되며 이것이 곧 구원의 상태이며,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삶을 삶대로 만끽하는 것! 어쩌면 이런 연장선상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 하신 말씀도 비슷하다고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 곧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5,41)하신 말씀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삶을 충만히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의 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묶고-억누르고-눈멀게 하는 모든 것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전제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된 모든 면에서 먼저 죽어야 만이 참된 부활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혹여 여러분 주변에는 심신 장애아를 둔 부모님들이 계십니까?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이런 부모님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면서 무척 마음이 안타깝지만, 단지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심신 장애아를 자녀로 둔 부모님들께 위로와 함께 격려의 기도를 바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라’에게는 정신 장애뿐 아니라 시각 장애, 간질 등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좌절과 분노의 시간을 겪고 난 뒤 부정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일상생활 대부분을 아들과 함께 지내며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를 중심으로 한 인간성의 문제를 다룬 소설을 썼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회와 세계, 이를 초월하는 세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모두 아들과 함께하는 삶에 기반을 두었으며 그의 삶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의 존재는 내 삶의 밝은 면뿐 아니라 어둡고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밝혀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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