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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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11,23)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많은 당나귀를 키우는 어느 농부가 당나귀 한 마리를 더 사기 위해 시장에 갔습니다. 그는 여러 마리의 당나귀 중에서 한 마리를 고른 후에 상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이 당나귀를 집에 데려가서 부지런한지 게으른지 알아본 후에 게으른 녀석이면 바꿔 가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상인의 허락을 받은 농부는 자기 집으로 당나귀를 끌고 와서 외양간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새로 온 당나귀는 이리저리 당나귀들 사이를 거닐다가 그중 제일 게으른 당나귀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잠시 후 두 당나귀는 친해져서 사이좋게 먹이를 먹게 되었지요. 이 모습을 본 농부는 그 당나귀를 다시 상인에게 끌고 갔습니다. "이 당나귀는 게을러서 내게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다른 당나귀를 보여주시오" 그러자 당나귀 주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지요. "아니 끌고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 당나귀가 게으른지 부지런한지를 안단 말이요?" 농부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 그 당나귀를 보고 안 것이 아니라 그 당나귀의 친구를 보고 알았지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장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삶의 태도나 행동은 유유상종의 뜻처럼 비슷한 사람만 관계하고 교류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편을 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모든 이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이런 예수님의 의도와 반대되는 생각과 행동이 바로 유유상종이며 끼리끼리만 살아가는 행위라고 저 역시도 동의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갈라진 세상인데,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마저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파당을 짓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현실이며 사랑에 어긋난다고 느낍니다. 보편적 사랑이란 자기중심적인 기준이나 척도에 따라서 ‘좋아함과 싫어함’ 그리고 ‘잘함과 못함’을 구분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11,23)라고 편 가르기를 하신 듯 말씀하신 배경은 바로 베엘제불 곧 악령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편부당하게 사랑해야겠지만 ‘하느님과 마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선택하고 확실하게 한 편을 미워하고 한 편을 사랑해야 하며, 한 편을 거부하고 한 편을 수용해야 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결코 양립하고 함께 수용할 수 없습니다.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함께 공존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의 본질적 실존이 메시아라는 데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나아갈 길을 보여주며 충만한 사랑을 누리도록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파괴하려는 힘들과 대적하기 위해 파견되셨습니다. 성서에서, 사탄은 하느님한테 나오는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활동하며, 이들은 인간을 유혹으로 이끄는 자들이며, 처음부터 ‘살인자’(요8,44참조)였으며 한 ‘나라’ 곧 어둠의 세상의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어둔 상태, 죄의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진리와 겸손 그리고 기도하는 영혼에게 사탄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의 힘은 인간이 죄를 짓는 만큼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힘을 발휘하려고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육적-심리적-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참으로 무섭고 힘들며 긴 시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 앞에서 그 시간은 요한묵시록이 보여주듯이 금방 지나갈 것이기에 영원한 시간의 축복을 위해서라도 이겨내야 합니다. (묵3,11; 22,7 참조) 예수님은 사탄으로 생겨난 어둠의 세계를 하느님의 진리로 두루 비추셨고, 자기 탐닉과 고집과 미움으로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녹여주셨으며, 베엘제불의 영향으로 황폐해진 마음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 역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더욱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 그리고 적개심을 일으켜 세우고,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며 자기기만에 빠지게 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적대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을 부추겨 그분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짓밟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고 실패가 예상하더라도, 다만 하느님 아버지의 대자대비하심을 믿고 묵묵히 세상에 하늘나라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는 어리석은 농부이십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의 빛(요1,4)이었지만, 당신 사랑과 은총이 인간들의 완고함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예수님은 자기 자유로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요10,18) 예수님은 사람들의 속량,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사랑으로 십자가에 봉헌하심으로써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원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세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11,21~22)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일한 메시지를 요한복음에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16,33), 그리고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 것이다."(요12,31~32)라고 다른 음색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적대자들과 맞서 가장 깊은 내면의 영의 힘으로 싸우십니다. 그분의 싸움을 감지한 모든 군중이 깜짝 놀라워하며, 그들 가운데 몇 사람(=마태오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11,15)라고 아우성 거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내를 궤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사탄과 대적하고 있는지 너희는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어떻게 사탄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고, 나의 활동이 그들의 나라에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이냐?, 고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가르치신 연후에 예수님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11,2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싸우셨지만, 그 싸움은 영적 싸움인데, 그분의 싸움 무기는 바로 싸우지 않음으로써 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낮추시고 비우심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스스로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육신으로 모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사탄과 마지막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로써 사탄도 어찌할 수 없는 처절하고 전적인 자기 비움 곧 Kenosis로 더 이상 어둠이 아닌 빛이, 미움이 아닌 사랑이, 거짓이 아닌 참이, 죽음이 아닌 생명이 텅 빔 안에 충만한 새 생명으로 꽉 차게 되었으며 이를 죽음에 대한 승리 곧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한 전사는 성내지 않습니다.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춥니다. 이를 일러 ‘겨루지 않음의 덕不爭之德’이라합니다. 이를 일러 ‘사람 씀의 힘用人之力’이라 합니다. 이를 일러 ‘하늘과 짝함配天’이라 하는데 예부터 내려오는 지극한 원리입니다.』(68장) 예수님은 이렇게 싸우지 않으시고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셨으며, 이렇게 우리 또한 당신이 보여주신 삶의 방법으로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길 바라십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예7,24)라면, 이제는 어둠이 아닌 빛을, 거짓이 아닌 참을, 죽음이 아닌 생명을 향해 길을 걷도록 초대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등불 삼아 꿋꿋이 나아가야 할 것이며,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분명히 어둠의 자식이 아닌 빛의 자녀이지만 사탄이 좋아하는 편 가르기에 편승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통회합니다. 이젠 다만 구원의 바위이신 당신 앞에 서서 회피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어둠의 세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당신의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제 마음을 비워 그 빈 자리에 당신의 성령께서 자리 잡고 머물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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