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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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7,40~41)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예전에 여러 본당에 가서 사순절 특강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강론을 들었던 신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강론 후 신자들의 인사말과 눈길로 대충 짐작할 수는 있지만 ‘제 강론이 어떠했나요?’라고 물을 용기도 없고, 사실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저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물을 따름입니다. 또한 이젠 신자들의 반응에 따라서 저의 느낌이 업 혹은 다운되지 않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인 반응은 다양합니다. 예수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평소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무시하고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의 수난’처럼 각자는 자기 식대로 알아듣기에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곡해하고 오해하고 흠집을 잡기 마련입니다.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저 역시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식대로 들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이나 내용도 별로 달갑지 않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듣는 자가 말하는 타인에 대한 편견이고,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기인한 오만에 따른 자연적 반응이라고 느낍니다. 
         
영화로도 보고 책으로도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제목이 저에게 강한 이미지의 잔상을 깊게 남겼습니다. 편견, 사실 偏見이란 단어만이 아니라 偏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지극히 부정적인 뜻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별로 좋아하지 않은 글자입니다. 그런데 편견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물 · 현상에 대하여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 다시 말해서 특정 인물이나 사물 또는 뜻밖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가지는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이나 의견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어느 사회나 집단에 속하는 다수의 사람이 특정 대상, 특히 특수한 인종이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간직하는 나쁜 감정, 부정적인 평가, 적대적인 언동의 총체總體이다. 논리적인 비판이나 구체적인 사실의 반증反證에 의해서도 바꾸기가 어려운 뿌리 깊은 비호의적인 태도나 신념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있더군요. 이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은 예수님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모든 시대와 장소에 늘 있었습니다. 이런 편협되고 편중된 경향과 신념을 가진 부류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겪고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유대인들의 골수까지 박힌 오만과 편견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7,41.52)라고 단정 짓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붙잡아 오지 않은 성전 경비병들은 지도자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7,45)라고 추궁하자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열린 마음 곧 편견 없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서 지금껏 자신들이 만난 그 어떤 존재보다도 순수하고 진솔하신 분이심을 금방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미 자신 안에 편견의 너울이나 프리즘으로 눈과 마음이 가려져 있는 그들은 오히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는 자들이다.”(7,48~49)라고 예수님께 대한 편견과 군중들에 대한 오만을 표출하고 있잖습니까? 군중을 비난하고 무시한 그들은 바로 그 군중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사형선고 내리도록 연출한 영악하고 사악한 존재들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 하나가 다 자신들의 입지를 불편하게 하고 자신들의 처신을 난처하게 만든 예수님께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을 기대하지도 않지만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도대체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는 그들이 안타깝고 애처로울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굳어버린 오만과 편견이라는 비늘로 눈과 마음을 가려서 보아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이 오만과 편견이 모순되게도 자신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온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이들의 예수님께 대한 오만과 편견을 보면서 나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오만을 갖고 멀리하거나 무시한 사람이나 집단은 없었는가를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 물론 누구한테나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편견과 오만은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두 주인공, 즉 귀족 남자 다르시가 ‘오만’에서, 평민 여자 엘리사벳은 ‘편견’을 극복하고 사랑의 존재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렇게 변화되고 서로 견해나 신념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르시와 엘리사벳’은 자신들 스스로 만든 ‘오만과 편견’의 덫에서 해방되었기에 서로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가 되는 사랑으로 환희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처럼 누구한테나 나름대로 오만과 편견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지혜롭고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편견의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현행 국적법은 이주 아동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한쪽 부모가 한국 국적이 아니면 아동의 국적 취득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이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이 바로 지금은 사라진 새누리당의 ‘이자스민’ 의원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법안을 제출한 이자스민 의원을 향해 극우 사이트 ‘일베’와 진보 성향의 ‘오유’ 사용자 상당수가 동시에 그녀를 성토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새누리당 지지자가 새누리당 의원을 공격하고, 새정치연합 지지자도 이주민인 이자스민 의원을 비난합니다. 그녀에 대한 편견에는 이주민 혐오가 응축돼 있습니다. 특히 이자스민 의원은 이주여성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타자화됩니다. 불법체류자를 위해서 우리의 혈세를 낭비하려 한다, 는 혐오 논리입니다. 이렇게 계산된 편견은 시민인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낸 세금을 정부가 이주민· 성소수자 같은 비(非)시민, 종북세력 같은 반(反)시민을 지원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 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편견이 그녀를 몰아세워도 이자스민 의원이 숨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하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실 그녀를 향한 일부 보수와 진보의 편견은 우리의 현주소이며 자화상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녀가 당당하게 세상의 혐오와 편견에 올바른 처신과 대응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자스민 의원에게 한 것은 곧 모든 이주민에게 한 것, 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을 걸어가는 동반자요 도반입니다. 이 인생길에 예수님께서도 저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몸소 오늘 이 세상의 소수자들과 이주민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서 골고타를 향해 걷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그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지 않나요? 영화 ‘동주’에서 정지용은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라고 충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도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에게만 부끄러움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단죄하였기에 사형선고를.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더불어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편견으로 그들을 거부하고 단죄하는 어리석은 무지와 이기적인 악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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