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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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여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5,1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여 잘 지키고 실천하며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신4,1.6.9참조)고 당부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율법을 먼저 지키고 가르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예수님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마태7,12) 우리가 참으로 이웃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그러기에 사랑은 역설이며 사랑은 유혹 곧 사랑받고 싶은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5,18) 는 말씀은 사랑이 충만하고 사랑이 완성될 때까지 율법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양적인 의미에서 큰 사랑 혹 작은 사랑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사랑만이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가 사랑하려고 사랑이신 주님을 부를 때마다 주님은 가까이 계셔 주시고(신4,7),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의 시선에서 보면 사랑에서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이란 차이가 없지만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큰 사람과 작은 사람으로 구분되고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바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5,6)에서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5,19참조) 사랑으로 실천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깨달은 하느님의 규정과 율법인 사랑을 스스로 먼저 살고 또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참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신4,6)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는 수마허의 작은 표현이 우리네 일상의 많은 부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한때 사진 찍음을 취미로 즐겼지만, 요즘은 사진 찍는 것이 시들어지고 게을러진 듯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듯이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여러 이유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 이렇게 계절이 바뀌면서 들녘에 만발할 작은 들꽃을 보고 싶고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사진을 찍다 보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공감이 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주의 오름을 오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름 전체가 온통 들꽃이요 사방이 전부 들꽃이 만발해 있다고! 그곳에서 느끼는 것은 생명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우리 모두 다 아름답다, 는 사실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늘 큰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 온 우리의 일그러진 마음을 작은 들꽃의 무리가 모여 펼쳐진 풍광을 볼 때 참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들꽃 하나를 접사 혹 초접사로 찍는다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더 실감하실 수 있고, 그 작은 것 안에 모든 우주의 생명과 생명의 리듬을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저 광활한 대우주도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먼지 하나뿐인 작음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작음을 외면하고는 큰 것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나 계명도 작은 것의 실천으로부터 큰 계명이나 하느님의 큰 뜻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서 세상의 가장 미천한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체 안에 계십니다.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할 수많은 존재 중의 한 존재로 마치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겨자씨 한 알(마13,31-32참조)처럼 작은 존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지구라는 행성에 살았고 살아갈 인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갈 모든 사람에게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서 걸어야 할 길이 되시고, 살아야 할 진리가 되시며, 누려야 할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세세 대대로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5,17)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성하다.’는 그리스말로 ‘이루다’ 혹 ‘채우다.’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단순히 이루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본래의 뜻을 채워서 율법의 본뜻을 다시 찾게 하시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이나 계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잘 지키는지 지키지 아니한지를 따지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계명이나 율법 본래의 의도와 정신을 채워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계명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어기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 사람이 된다.”(5,19)라고 말씀한 것은 계명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계명의 본래 뜻과 정신을 되살려 완성하시고자 함이지 여러 가지 행위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실 누가 계명의 크고 작음을 구분할 수 있겠으며, 누가 자기 편리대로 어기고 어기도록 가르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편리나 안위를 위한 것이지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은 때론 큰 것보다 작은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99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셨고, 한 작은 아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를 작다고 하시지 않으셨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마18,6) 불행하다고 하였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18,10) 고 당부하셨습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은 큰 것의 시작입니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됩니다. 넓고 큰 강도 작은 개울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큰 바다도 한 방울의 물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큰일을 할 자격과 능력이 있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것도 소홀히 하게 마련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탈렌트 비유에서 분명하게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마25,21)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키도록 내려주신 계명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계명은 계명일 뿐입니다. 어쩌면 작은 계명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시시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사랑의 실천이며,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받는 길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수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나는 작은 새도, 들에 핀 작은 나리꽃들 하나에도 관심을 쏟으시는 주님께서는 모든 꽃이 다 아름답고 좋게 보시기에 우리가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몸짓을 참으로 사랑스럽게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 눈에 어느 것 하나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게 다 좋게 보입니다. 우리 역시도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계명 하나라도 큰 사랑으로 지키고 또 지키도록 도와주고 가르치는 우리 자신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을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며, 저희 앞에 내놓은 당신의 율법과 계명을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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