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03.20 09:51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조회 수 17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아니 되고 그것이 바로 복음의 사람인가 아닌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Mt20,28)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생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며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짐의 삶,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미구에 닥칠 당신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스승님의 양 옆 자리에 두 아들을 앉게 해 달라.>는

느닷없는 간청을 통해 하느님 옆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을 것인가라는 담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내심에는 이미 예수님의 살고자 하신 삶과 반대로 <높아짐의 삶과 군림할 수 있는 자리>에

대한 관심으로 제자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있었으며 제베대오 어머니의 간청을 계기로 표면화된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자리는 오로지 <아빠

하느님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0,23)고 밝히십니다. 다만 그 자리에 앉으려는 자는

세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천상적인 관점에서 <당신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스도교 자리론>에 대한 담론을 종식시키십니다. 섬김은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요청이며 초대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섬김을 받을 것이며,

종이 되는 사람은 첫째가 되어 맨 앞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주님, 섬김의 자리가 아직 제겐 불편하지만

그 자리가 바로 제가 훗날 앉을 꽃자리임을 명심하며 오늘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