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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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2,21)

이제 작년은 과거라는 시간의 창고로 옮겨졌으며, 금년은 현재라는 시간의 진열대에 올라왔습니다. 교수신문은 2023년 한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 라는 뜻입니다. 견리망의를 추천한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중어중문학과)는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바르게 이끌기보다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 같다”며, 출세와 권력이라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편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경우로 의심되는 사례가 적잖이 거론되고 있다, 고 추천 이유를 말했습니다. 견리망의를 선정한 교수들은 대통령의 친인척과 정치인들이 이익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고위공직자의 개인 투자와 자녀 학교 폭력에 대한 대응, 개인의 이익을 핑계로 가족과 친구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럴수록 정치인, 교회 지도층 그리고 신앙인 우리 모두 자기 이익보다 먼저 의로움을 살아가는 2024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전엔 설날 세배하면 어른들은 덕담을 해주었으며, 그 덕담 내용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삼남의 산간지방에서 어른들은 세배하면, ‘너에게 소 한 마리를 주니 끌고 가거라.’든가, ‘내 자네에게 닭 한 마리를 주니 안고 가게나’는 덕담을 해주었는데 이를 심축心畜을 준다고 했습니다. 물론 소나 닭을 준다고 해서 실제로 소나 닭을 주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짐승의 심성을 준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닭을 주고, 조심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거위를 주고, 제 꾀에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돼지를 주었습니다. 가장 빈도가 높은 심축이 조랑말이었다고 합니다. 조랑말은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한국 고유의 과하마果下馬로, 키가 석자 밖에 되지 않아 과실나무 아래를 지나다닐 수 있다, 하여 과하마라고 했습니다. 이 과하마가 설날 덕담에 빈도 높게 오른 이유는, 첫째 겸허하고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장점 때문이며, 놀라운 것은 비록 소인국의 말 같지만, 그 강인한 내핍성과 인내력, 운송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이라고는 겨우 짚 썬 것이 고작인데 100kg가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 피로한 기색 없이 하루에 50km식이나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수평 이동에는 과하마가 서양 말을 못 따라가지만, 수직 이동에는 서양 말이 과하마를 못 따라갑니다. 높은 산길이며 고갯길도 넘어가는 과하마는 좌절 없는 상승 의지의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이규태 코너에서) 2024년 설날 아침, 한국 고유의 과하마 한 마리씩을 덕담의 심축으로 선물합니다.

우리는 새해 첫날 아침,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는데 이는 곧 하느님의 축복에서 출발한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 민수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사제 직분을 맡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백성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6,24~26) 그렇습니다. 이는 단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한 축복의 기도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세상 사람이 바라는 복과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축복이 다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어둠과 거짓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 인생의 올바른 삶이며 가치인가를 찾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축복을 참으로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빌어주어야 하는 축복은 바로 참 평화인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새해 첫날 평화의 모후인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처럼 그리고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를 찾아 달려 온 목동들처럼 우리 모두 세상의 빛인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찾고, 그 평화를 간직하며 새해를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간직하면서, 이 평화가 세상으로 번져 나가고 퍼져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평화가 세상에 충만할 때 비로소 세상에는 다름으로 말미암은 차별, 곧 성性, 인종, 피부, 종교, 신분, 지역 차별을 받지 않고, 다름으로 인한 갈등과 불목, 억압과 폭력, 불의와 부정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함께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세상을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현존의 표징이며,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가져온 새 삶(=부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올 한 해 세상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천사들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2,14)를 노래하며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힘차게 출발합시다.

이 평화를 우리가 먼저 살고 세상에 빌어주기 위해서, 우리 모두 오늘 복음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본을 보여주신 신앙의 태도를 본받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아기에 관해 들었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자, 이를 들은 이들은 모두 놀라워하였다고 증언합니다. (2,18참조) 왜 그들은 목자들의 말을 듣고서 놀라워하였을까요? 아마도 무식하고 천한 그들의 입에서 천상의 신비가 선포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동시에 그들을 예언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느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분명 아기의 부모이신 요셉과 마리아 또한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는 홀로 마리아만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 라고 전하는 의도는 곧 우리 역시도 성모님의 이 마음의 태도를 배우며 실천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마음에 간직한 이 모든 일은 포대기에 싸인 채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장래에 대한 계시입니다. 성모께서 마음에 간직하다, 는 말의 의미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한 번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후에 표현된 되새겼다, 는 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곧 되새겨서(=자꾸 골똘히 생각하다.)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마음속에 간직하다, 는 것은 달리 말하면 기억한다, 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의 기억과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에 힘입어 성경을 기록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공생활 시작하실 때까지의 모든 일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의 기억과 진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가장 고유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기억력입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자녀에 관한 기억은 너무도 생생합니다. 이처럼 어머니 마리아는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신이 겪은 일은 간직하였을 것이며 그 힘은 바로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속에 간직했다, 는 표현은 이후 예수님이 성전에서 되찾으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고 대답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는 대목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처럼 성모님께서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일들 앞에서 평안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다리시는 모습은 참 평화를 바라는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참된 평화는 예수님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하느님의 뜻을 살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이를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한 해가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나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갑시다. 새해 첫날인 오늘 다시금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빕니다. 저 역시도 2024년 올 한 해, 프란치스꼬 교황님께서 언급하셨던 것처럼, 양 냄새가 물씬 나는 목자가 되길 희망하며 다짐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복음환호성:히1,2참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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