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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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 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요5,5.8)

벳자타 못가의 38년 동안 앓고 있던 사람의 치유를 기점으로 예수님과 유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게 되며, 성서는 이 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5,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부와 박해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앓고 있는 이를 치유하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앓는 이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교부들은 벳자타 못가에 누워 있는 병자들이 세 부류의 다른 질병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요5,3참조) 먼저 ‘눈먼 이’는 세상의 즐거움에 매여 빛보다 어두움을 택한 이들이며, ‘다리 저는 이’는 하느님과 세상 가운데 머물면서 두 주인을 섬기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는 은총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아 연약해진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오늘 치유 이야기의 대상인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입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던 병은, 그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그가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불행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치유 받기 위해 많은 환자가 벳자타 못가로 모여 와 있었기에 그에게는 치유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 줄 날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운명적인 순간이, 운명적인 은총의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것은 유대인들의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이곳, 은총의 자리에 구원의 장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환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누워 있는 그를 보시고 그가 참으로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그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5,6)(=공동 번역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을 한 마디로 “저는 낫기를 원하지만,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5,7)라고 대답합니다. 이 표현은 결국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도,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자신의 병을 돌보아 주는 사람 없이 철저히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마치 그는 분명 그곳에 오랫동안 있었음에도 그곳에 없는 사람처럼, 즉 장식물처럼 철저하게 무시당해 왔고 외면당해 왔었겠죠. 그는 단지 육신적인 질병을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온 것만이 아니라 존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철저하게 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 현재 느꼈거나 느끼고 있는 군중 속의 고독처럼 모든 사람이 피부로 느껴지고 공감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어려움에 놓여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우리를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아왔던 그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런 그가 참사람이며 하느님이신 분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 앞에 서 계신 그분께서 자신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묻자, 처음에는 낯설고 너무도 이상하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낫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건강해지고 싶으냐? 혹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질문의 의도는 바로 환자의 치유 받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구원이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듯, 스스로 눈멂을 인정하고 눈뜨기를 원할 때, 환자가 스스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낫기를 간절히 원할 때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인의 낫기를 원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동의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때론 어리석게도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체념과 낙담으로 살아왔기에,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 낫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7,15.19) 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서른여덟 해는 전혀 짧지 않은 세월이고 그 긴 세월 동안 몸도 마음도 익숙해진 이 생활 스타일을 역설적으로 낫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물었고 변화하기를 원한다는 그의 의지를 확인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확인하고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5,9)라고 이 순간을 간략하게 표현합니다. 이로써 그는 그가 만난 참사람이신 예수님과의 은총의 만남으로 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 한 사람의 치유만이 아니라 세상 살아오면서 어떤 누구에게서도 관심과 인정을 받아 보지 못하고, 있지만 마치 없는 존재로 살아온 우리에게도 어제와 전혀 다른 새로운 날을 열어 주시고 우리 역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들것은 육신의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지금껏 환자에게 들것은 자기 삶의 터전이요 전 재산입니다. 벳자타는 그가 그동안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기고 지내 온 안식을 취하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주님은 그에게 독려하십니다. 이젠 더 이상 들것에 의존하면서 육신적 만족감을 취하지 말고, 그것에 저항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들것은 더 이상 누워 쉬는 곳이 아니기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치유된 이에게 새로운 과제가 부여됩니다. 그 과제는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신앙과 삶의 과제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제 누군가 어려움에 놓여 우리의 도움이 필요로 할 때 그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이해해 주고 사랑을 베푸는 참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영적으로 깨어 힘차게 걸어 나갑시다. 

끝으로 ‘베르트 브래크트’의 「목발」이란 시를 함께 음미해 봅시다. 『일곱 해 동안 스스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내가 저명한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왜 목발에 의지합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마비된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며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그냥 걸어보라! 너를 마비시키는 것은 그 잡동사니이다. 넘어지더라도 네 발로 기어가라! 호탕하게 웃으며 그는 아름다운 목발을 집어들어 내 등 뒤에서 부러뜨렸고 그것을 불 속에 던졌다. 나는 치유를 받았다. 걸어간다. 그 호탕한 웃음이 나를 치유했다. 나는 의지할 수 있는 목발을 볼 때마다 잘 걷지 못한다.』“주님, 저희 또한 들것에 의존하지 않고 부족하며 부족한 대로 거침없이 일어나서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도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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