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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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7, 28)

여러분은 어떤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앎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합니다. 살다 보니 제가 뭘 조금은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참으로 제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더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껏 아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왔다면 앞으로 삶은 모르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난 온 제 삶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에 제 전 존재와 제 삶을 봉헌하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마저도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살아왔다고 느껴집니다. 한 번도 갈멜의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면서도 마치 정상에 도달한 사람처럼 저 자신과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살아왔다고 느껴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살고 있는 수도 생활 그리고 수도 생활을 살아오면서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 온 영성 생활도, 앎과 모름의 양적 차이를 비교하자면 모름에 비해서 저의 앎은 너무도 미미하고 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7,28) 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렇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7,28~29) 고 말씀하시니 더욱더 저의 앎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너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는 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이젠 주님 저는 참으로 당신 아버지이며 저의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고 밖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는 저 자신임을 인정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살아왔으며 또한 무엇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참으로 앎과 모름이 제 머리와 마음에 뒤섞이면서 혼란스러운 오늘 아침입니다. 지금 순간까지,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왔는데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다 보니 정말이지 하느님에 관해서는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말하면 말할수록,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모름이 명확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네. 저는 아버지 하느님을 잘 모릅니다’, 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쩜 제가 지금껏 하느님을 안다고 말해왔던 것은 기실 신학적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 사랑의 앎 수준에 도달하고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10,14~15) 는 언급에서 드러나듯이 참으로 안다는 것은 사랑할 때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참된 앎은 곧 사랑의 앎이며, 사랑의 앎이란 결국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노인이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열세 살 때 나는 거장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 평생이 걸렸다.” 믿음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 것이 무미건조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소위 철이 들었기에 어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온 삶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궁구하기를 체념한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무덤덤한가요. 마음 깊이 쌓아 놓은 실망들, 내려놓지 못하고 간직한 실망들이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과 사랑의 앎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피카소가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 평생이 걸렸다고 이야기한 것은 유치한 상태로 퇴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롭게 성숙한 두 번째 천진난만함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는 곧 유치한 상태로 퇴보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숙한 상태로 전환된다는 뜻이겠죠. 이는 살면서 온갖 부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해 묻고 구하고 기도하려 하고, 사랑하려고 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겠죠.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의 열린 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험과 배움을 쌓아도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처럼 저 역시도 젊은 날의 불타오른 믿음과 정열적인 사랑만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저는 예전처럼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도 의지적 사랑으로 더욱더 집요하고 끈질기게, 제가 제일 잘해왔고 가장 큰 장점인 충실하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고 싶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다니면서 우등상은 타보지 못했지만, 개근상은 탔었습니다.) 젊은 날의 하느님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경력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예전 피정 지도하러 갔을 때 청주 경로 수녀회(=지금은 수원)의 벽에 걸린 글귀처럼, ‘나이 들면 세상적인 눈을 침침해지지만, 영적인 눈을 밝아질 것’을 믿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암살모의(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 사면을 받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형지에서 그곳에는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성경 한 권뿐이었고 그는 수형 생활 동안 여러 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그는 1854년에 자기에게 성경을 준 어느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해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이 현존 체험 이후 무신론자였던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바뀝니다. 그가 1866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은 변화된 그의 문학 세계의 특별한 표출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킨 힘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고통과 사랑의 체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며, 그 힘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알고, 사랑으로 하느님을 살아가는 삶에서 솟아 나온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 우린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을 체험하면서 차츰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아빠 하느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날 뵈올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요14, 8)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14, 9.11)라고 확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거울이며 판박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빠 하느님을 만나고 아빠 하느님과 사랑의 앎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몰라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앎이 미미할지라도 그것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아시듯이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느님을 알면 좋겠지만 다 알 수 없을뿐더러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일이기에 우리의 앎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으로 부족하지 않으리라 보고, 이를 깨우쳐 주시고 저희를 매일 아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과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도록 합시다. 모르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로 축복임을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저희 또한 당신이 어디서, 누구한테서 오셨는지 알고 있으며, 매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온전히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해서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저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체험하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손길과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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