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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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11,50)

복음의 분위기는 긴장과 갈등이 점차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일부 기득권층의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위기감과 위기의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위기감은 ‘얼마나 참고 인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며, 위기의식은 ‘과연 나,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결국엔 그 해결 방안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이를 방치하다 보면 통제 불능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을 염려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소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11,47) 라고 현실을 인정하면서 묘안이나 묘책을 논합니다. 이때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11,50) 하고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악과 악인을 도구 삼아 선으로 이끄시기도 합니다. 카야파는 그들에게 가시와 같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을 제시하면서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코 풀듯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궁색한 자기 논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자기 합리화로 지금도 흔히 궁하면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 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와 유린 그리고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는 의식은 예수님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과 교회 그리고 공동체에 암묵적으로 누룩처럼 깊이 내재되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선 「복음의 기쁨」에서 이런 사조를 ‘영적 세속성’이라 명명하며, 이를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영적 세속성에 빠진 이들은 높고 먼 데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형제자매들의 예언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내며 겉치레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자기 내면과 관심사에만 제한된 지평에 갇혀 있습니다. (중략)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에서 저희를 구하소서!』(97) 

복음은 그의 의견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11,51) 하고 말입니다. 구세사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신 것” (11,52) 이라는 주석을 달아 놓습니다. 이런 민족적 기대와 희망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희망에 찬 예언인,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37,21.22)라는 말씀으로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도 자신이 공동체와 조직을 위해 그 희생양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타인에게 공동선을 위해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카야파의 의견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53) 이를 감지한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잠시 떠나 광야에 가까운 에프라임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어쩌면 一戰을 겨루기 위한 숨 고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자신들의 궁금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11,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꽁무니를 빼지 않을 것임을 그들도 예견했나 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스도 죽음에 넘겨지셨네.” (영성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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