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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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가 느끼고 깨닫는 점은, 권위 상실이란 실상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은 물론 우리나라는 지금 모든 권위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분명 세상은 심각하고 신속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안정이 없는 것은 참된 권위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는 필연적인 과제이며 현안이고, 새로운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권위 회복이 절박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데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그 해답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인용했었지만, 어느 한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천하에 權있고 力있으니, 權있는 자에게 力이 없거나, 力있는 자에게 權이 없으면 천하가 平安하다>고 하였습니다. 흔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거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권력은 권력을 가진 그 사람을 병들게 하며 그로 인한 피해는 당연히 힘없는 약자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지도자 즉 억압, 위선, 기만, 사욕으로 가득 찬 지도자들에게 오래도록 시달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권위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공동체에 필수 불가결한 책임, 곧 공동선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권한이라면, 부정적인 권위주의란 권력자가 권위와 권력을 혼동하고 권력이 권위의 본질이라고 착각하였기 때문이었죠. 권한이 많거나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권위가 있거나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자칫 트럼프처럼 착각하고 곡해할 경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시간 권력 지향적이고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우리가 겪은 어둠이며 상처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옛 권위가 아닌 새로운 권위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 까닭은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가르침에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Mr1,22)고 전합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워하였을까요? 그 놀라움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언행을 두고 신성 모독과 불경이라고 생각했기에,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엔 분명 율법 학자와 달리 익숙함이 아닌 낯섬, 평범함이 아닌 독특함을 느꼈기에 군중들은 놀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힘인 성령 충만에 따른 내적 活力의 외적 活動>이라고 표현하며, 이점이 다른 권한을 가진 사람들과 그 근본과 본질에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모든 지도자의 권위는 아래(=땅)에서 왔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위(=하늘)에서 주어졌기에 권위 곧 힘의 차이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존재와 삶에서 표출表出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분이 그 진리를 존재와 삶으로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근본으로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그분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단순성과 함께 진솔성을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의 삶, 곧 언행일치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말로써 말씀하신 분이라기보다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증거 하신 분이셨기에 그 말씀에 권위 곧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껏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듣기 좋은 말과 허울 좋은 가르침을 듣고 살아왔기에,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만 앞세우면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살아 온 지도자들에 대해 마태오 23장에서 신랄(辛辣)하게 비난하셨던 이유입니다.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말로 가르치니 반항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바로 높은 사람 곧 권위자가 먼저 허리를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과 자신이 말한 바를 삶을 통해서 살려고 할 때 우러나온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권위자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실제로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악마마저도 예수님의 이런 권위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악령마저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저희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1,24)하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권위임을 더러운 악령의 입을 통하여 알립니다. 더더욱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1,25)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1,27)하고 감탄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생물-동물-인간)은 저마다 원칙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인간다운 삶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칙에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살아야 그 길과 그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바를 충실히 살 때 <더러운 영>의 억압과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악령을 추방하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권위, 힘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고백과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왔던 과거의 세상의 권위는 나이, 직책, 신분 등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면, 이에 반해 그리스도적 권위는 신분이나 직책에 상응하는 내용, 삶이 전제해야 힘이 있습니다. 그 신분에 맞는 <다움: 사제다움, 수도자다움>이 있을 때 신자들의 인정으로 그 빛이 발하고, <답게: 사제답게, 수도자답게> 살아가는 분에게 저절로 머리를 숙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작년 10월 4일 삼종기도에서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참된 권위란 타인을 착취하는 게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적 권위는 힘과 특권에서가 아니라 섬김과 봉사에 있으며, 말로써 행함이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말함에 있다고 믿습니다. 제 경험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내외적으로 온전히 순명하지만, 권위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단지 외적인 순명만 있을 뿐 내면에서는 존경하지 않고 인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또한 더러운 영마저 복종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예수님의 권위에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 마음을 무디게 하지 않도록>(화답송 참조) 깨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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