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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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17일(=재의 수요일)부터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 시기의 복음은 아주 간결하고 극적이면서도 사순절의 의미를 잘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곧 사순시기란 예수님이 겪으신 사탄의 유혹과 거룩한 변모를 중심으로 죄에서 회개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자아의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한 화해의 때이자 은총과 구원의 시기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는 속담처럼 그 시작을 예수님의 유혹으로부터 시작하며, 이 사순절의 첫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이고, 둘째 단락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첫째 단락에선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Mr1,12참조)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모든 인류)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인 동시에 유혹의 장소입니다. 시험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으로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되지만, 유혹은 사탄이 달콤하게 찾아와서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유혹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삶은 끊임없는 유혹의 연속이기에 마지막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유혹받을 것이며, 이는 인간의 실존이자 상황입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스는 <아무도 유혹을 받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유혹이 없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에게는 유혹이야말로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발판이라는 점을 환기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 곧 인간과 같아지시기 위해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사탄의 유혹을 직접 겪게 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인간의 실존이기에 예수님을 그리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유혹을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극복하셨다면 우리는 그렇지 못했고 넘어졌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 때, 예상하지 않은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우리는 종종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유혹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의 업적을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역시 결국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느님을 저버리고 유혹에 떨어져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에 충실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권력, 명예, 쾌락이 주는 유혹을 이겨 내셨고 그런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도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고자 자신과 싸움, 사탄과의 영적 투쟁심을 새롭게 고무鼓舞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많은 유혹을 이겨 내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그 믿음은 이미 세례의 순간 들었던 아버지 목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노력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셨지만, 이 모든 바탕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순명으로 예수님은 유혹을 이겨 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면 그 순간의 쾌락을 인내하지 못해 유혹에 넘어가 죄에 떨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유혹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살아가기에 그런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은 유혹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힌다고 생각합니다. 또 유혹 그 자체가 죄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유혹은 유혹일 따름,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동의가 있을 때 유혹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줍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혹이란 수건을 비비는 비누와 같습니다. 비누가 수건을 더럽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깨끗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Mt26,41)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도만이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유혹을 이겨 낸다면, 이는 곧 훌륭한 신적 덕행인 信望愛德을 쌓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유혹을 이겨 내셨기에 오늘 복음의 둘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고 당신 육화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때이며 하느님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예수님의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세상에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몫이 아니며 오직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해서 복음대로 사느냐 아니면 회개하지 않고 복음과 상관없이 사느냐는 것은 우리의 의지의 선택이자 결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때맞춰 선포하셨고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며 결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회개>하고, 그 이후에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회심)가 선행되지 않으면 복음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길-돌밭-가시덤불과 같다면(Mt13,4~8참조), 그런 마음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먼저 회개 곧 우리 마음의 밭(心田)이 좋은 땅으로 일구어질 때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 돌아가서 계약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수브’라는 표현을 사용했었습니다.(에3,19;13,22;14,6 등). 따라서 회개와 관련해서 사용될 때 이 말은 단순히 이성적인 생각을 바꾸거나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과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 하느님께 돌아가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회개, 곧 철두철미한 전인격적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관심의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몰입하는 것이며,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되돌아가려는 회개의 결단이며 믿음입니다.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하느님의 존재로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게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안에 무언가 가득 들어있기(=욕망/자신의 의지...) 때문입니다. 결국 마음을 비우는 게 관건인데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할 때만이 우리의 뜻과 욕심을 내려놓고 비우게 되며, 그때만이 하느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결코 자신을 비울 수 없습니다. 생명과 진리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할 때, 우리 욕망이 제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은총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을 비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회개의 삶이 복음을 믿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참다운 회개의 신앙,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 21) 이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멀어진 삶을 살면서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의 福音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출발점이자 토대인 회개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고, 그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앞당겨 살게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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