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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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6,36.38)

2016년 교회는 자비의 성년을 통해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 자비를 베푸는 교회로 거듭날 수 있는 한 해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80년 선포하신 「자비의 회칙」 이후에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자비로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다시금 재조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용서)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의 예수님의 만남에서 드러난 것처럼, 또한 다니엘 예언서에도 언급된 것처럼, 그것은 인간의 부끄러움과 하느님의 의로우심, 비참함과 자비하심의 극명한 간극間隙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비참함과 부끄러움은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때 하느님의 전지전능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볼 때 우리의 얼굴에는 부끄러움만 가득하지 않고 그 자비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희망에서 솟아나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각성할 수 있게 됩니다.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5,48) 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6,36) 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누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완전함을 당신께서 친히 보여 주신 사랑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조금 더 아버지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로13,10) 고 했고, 교회 역시 「교회헌장 40항」에서 인간이 실현해야 하는 완전함은 바로 주님께서 실제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마르12,30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함에(요13,34;15,12참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태오와 루카의 관점이 상이하다고 보기보다 유사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루카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새로운 어휘로써,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비전과 통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기 이전, 이스라엘의 주된 관심사는 성과 속(=거룩함과 불경함), 정과 부정(=깨끗함과 불결함)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였지만, 이는 동전의 한 면에 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곧 자비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거룩함은 비판적이며 회의적으로, 거룩하지 않은(=죄인) 혹 깨끗하지 않은(=불결/부정) 사람들과 분리, 분열, 차별 그리고 적대 관계가 팽배하지만 이에 반해 자비함은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비록 그 존재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 내지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과의 관계에서 일치, 친교, 존경과 환대가 있으며 그들을 지지와 나눔이 우선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어떤 이미지를 갖고 사느냐는 단순히 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동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거룩함을 우선시할 때 교회 안에서 의인과 죄인 그리고 깨끗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으로 구분되고, 심판과 단죄가 빈번하게 벌어지며 바리사이들처럼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종교인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이미지를 사는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지금껏 의롭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지 않은 흔히 죄인이라고 해서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버지시며 어머니시고, 거룩하시면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흔히 말해서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다, 고 하는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닮아갈 때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며, 비록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 분열과 불목이 아닌 일치와 친교가, 단죄와 심판이 아닌 용서와 자비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리라 봅니다. 

이렇게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를 베풀 때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저희 품에 담아 주실 것”(6,38)을 저는 믿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우리 아버지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해서 자비를 살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단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은 사람이며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전 메쥬고리아 성지 순례할 때, 미사 중에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하자 그런 표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양반 왈, 왜 불교 용어를 미사 중에 사용합니까?, 라는 항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의 화신이며 육화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같아지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존재 상황과 관계를 함께 나누시기 위한 사랑을 사셨는데 그 사랑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同體大悲, 同其塵(=티끌과도 하나됨)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사람인 우리와 모든 점에 있어서 같아지신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깨닫고 실천해야 할 우리 존재의 새로운 비전과 통찰은 다름 아닌 자비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자모이신 성교회가 되살려야 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자비이며, 이 자비가 교회 안에 넘쳐날 때 세상의 수많은 고통당하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피신처가 쉼터 그리고 품이 되리라 봅니다. 

어느 분은 이런 표현을 하더군요. 빵을 말썽 없이 나누려면 쪼갠 뒤에 먼저 골라잡게 하라, 고 말입니다. 어찌 빵뿐이겠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약자나 소수자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면 그 시점에서부터 관계와 소통이 그리고 화해와 친교가 일어날 것이며 이것이 오늘 복음의 자비라고 봅니다. 타인을 나와 다르다, 거룩함의 시선에서 의인과 죄인의 구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심판하는 사고 의식과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부단히 은총을 청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자비를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 (시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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