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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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4,27)

오늘 복음은 오늘뿐만 아니라, 연중 시기(22주간)에도 봉독됩니다. 그런데 동일한 복음이지만 봉독되는 시기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연중 시기의 분위기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순시기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의 도입부인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4)라는 말씀도 그저 통속적인 속담의 인용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순시기에 이 말씀을 듣고 있자니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이미 암시되고 예정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구약의 민수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사람은 공동체가 진영 밖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15,5) 이는 예수님의 올곧은 말씀과 행동이 고향 사람들의 선택된 민족이란 자긍심과 자존심을 흔들었기에 이런 결과가 파생되었는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바람에 부응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고 거기에다 자신들을 무시하듯이 이방인인 시돈 지방의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를 들먹거리면서 이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신 예수님 언사는 그들의 분노의 기름 항아리에 불쏘시개를 던진 모양새입니다. 이 결과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하셨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실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와 까닭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사순시기의 전례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장면은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엘리야 시대에 큰 기근이 들어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사렙타 마을의 과부만이 기근에서 살아났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만이 치유 받은 사실을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들의 기복적인 신앙과 세속적인 욕망을 흔들어서 영적 눈멂과 잠듦에서 깨우려는 의도였지만, 고향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를 통해서 선택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기근에서 구제받을 수 있고, 나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더 연장하면, 세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 신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근이나 질병에서 구제되고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나 행업이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이며 자비의 드러남이라는 것입니다. 

기근을 겪는 과부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무엇이 사렙타 마을의 과부만이 굶지 않았으며, 나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그토록 많았는데 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치유 받았을까요? 물론 오늘 독서인 열왕기에서 ‘나아만’이 어떻게 치유 받게 되었나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오늘 현대인의 사고 의식처럼 치유가 인간의 정성과 봉헌에 달렸다고 믿었기에, 금은보화를 잔뜩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왕과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온 모습이 인상적이면서 아울러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싶어서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런 물건과 더불어 시리아 왕의 친서를 받은 왕은 노발대발하면서 옷까지 찢으며 격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다니!”(1열5,7)라는 푸념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 자기 위신이나 체면에 관심을 두는 왕의 불안한 내면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엘리사는 차분히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사람을 통하여 전하면서,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1열5,8)라고 선언합니다. 엘리야는 바로 나아만을 통해서 하느님이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시다, 는 사실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곧 모든 치유와 기적은 언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그 영광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구한 것은 지극히 단순한, 어쩌면 너무도 시시콜콜한 것이었기에 나아만은 이를 거부하려고 했지만, 부하들의 간곡한 권유로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열5,10) 라는 엘리사의 권고대로 하였더니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는 치유란 아주 특별한 어떤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아주 특별하고 거룩한 것으로 바뀌고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나아만은 엘리사 앞에 서서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1열5,15)라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이 치유 받은 것은 그의 지극 정성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자비심과 무한한 사랑의 출현이며,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함께 계시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뿐입니다. 이렇게 치유는 하느님 현존의 표지이며 하느님 사랑의 드러남입니다. 그러기에 치유와 구원이 필요한 인간은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향한 의탁과 신뢰에 찬 사랑의 고백만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상황에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은혜를 받기 충분한 자격을 가졌기에, 정성이나 행동이 흡족했기에, 우리에게 한 없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은혜란, 은총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에게 주시는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이며 베푸심입니다. 나아만이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가 은혜받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봉헌해서도 아니었고, 다만 어린아이처럼 일곱 번(=완전한 숫자) 요르단강 물에 몸을 씻는 행위(=회심과 정화)를 통해서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낮아짐과 내려감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당신 고향 사람들과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신들의 뜻이나 의도보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신뢰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살려고 하는 마음가짐 곧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하느님의 자비에 내어 맡김을 가르치고자 하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적으로 <성사의 사효성과 인효성>을 아십니까? 성사의 은혜는 인간의 정성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유효하지만, 동시에 성사에 임하는 인간의 정성과 태도에 의해서도 은혜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의 복음에서 인용한 사렙타의 과부와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 저의 약함을 치유하시는 당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가 늘 저와 함께한다면 저의 약함과 병듦이 두렵지 않을 것이며, 저를 통해 세상에 당신께서 여기 함께 계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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