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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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백설공주>를 월트디즈니사 최초로 제작한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란 영화를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아닌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란 뮤지컬이 상연되었죠. 그 내용은, 일곱번째 난장이 반달이는 백설공주가 자신이 사는 안개나라에 왔을 때부터 공주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사랑을 고백해보지 못합니다. 공주가 잠이 들었을 때 먼 나라 왕자님이 와서 공주를 살릴 수 있음을 안 반달이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잠든 공주를 옆에 두고 영원히 같이 있을까? 비록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먼 나라 왕자님을 데려와서 공주를 살릴까? 결국 반달이는 먼 나라 왕자님을 찾으러 가는 선택을 합니다. 공주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공주의 행복이 곧 자기 행복임을 알고 자기를 온전히 비우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 대화 중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인 니코데모는 유다 최고의회 의원이자(요한 3,1) 명예와 덕을 겸비한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도(3,10) 예수님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다의 지도자들과 바리사이의 비난의 대상이었기에 니코데모처럼 평판이 자자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거나 접촉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의 시선과 이목이 두려워 아무도 볼 수 없는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행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라는 알 수 없는 깊은 번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3,2참조) 예수님은 이런 니코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하고,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3,14~15참조) 예수님께서 구리 뱀 이야기를 하신 것은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 굶주리고 지쳐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하자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자,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았더니, 그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리 뱀 이야기는,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신하고 배신하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벌을 주시지만, 항상 자비와 은총도 함께 마련해 내려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는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5,20)라는 말씀대로, 죄가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3,16)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도 인생을 살아가면서(=신앙생활) 닥친 많은 어려움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하느님께 불평할 때마다, 불뱀 곧 사탄에게 물리는 치명적인 죄를 짓습니다. 사탄에게 물린 자들은 크게는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고 작게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일이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망과 불평은 불뱀에게 물린 것처럼, 깊은 상처를 입힙니다. 그럴 때 구리로 만든 뱀을 보고 옛 이스라엘 백성이 치유되었듯이, 십자가에 달린 분을 보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다.>(3,18,17)는 선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더이상 죄의 어둠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의 빛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어둠은 위선이고 가식이지만, 빛은 진실이고 참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자신이 한 일이 사탄 안에서 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라면, <빛은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21)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숨겨진 어둠을 하느님의 빛 아래 정직하게 직시하고 직면하는 일이며, 더이상 어둠을 사랑하고 어둠 속에 숨지 않고 구원의 빛으로 나아가며 사랑의 빛이자 구원의 빛에 귀의歸依이며 사랑의 의탁입니다. 십자가를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 비로소 십자가에 달린 분의 치유의 힘과 구원의 은총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사순절에 십자가 바라보며 참사랑 보여주시니 새 삶을 살아가리>(성가127장2절 참조)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은 단지 외적인 고통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라, 그 사랑이 너를 구원함을 믿고 의탁하라는 뜻이지요. 고통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는 압도적 능력이며 지혜이고 힘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주어졌으나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3,16~17)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여,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자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36,23) 어제도 지금도 세상의 통치자들이나, 모든 세대의 많은 사건은 하느님의 손이 하신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하느님의 눈길과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작품임을 배웁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에2,8~9) 우리의 공로나 선행, 노력으로 구원받았으면 자랑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에게 전적으로 거저 주어졌습니다. 모든 참된 선물이 그러하듯 하느님의 구원 역시 예수님을 통해 ‘공짜’로 주어진 무상의 은총입니다. 
                                                                      

니코데모는 평생 경건하게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인 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왔다가 율법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나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드러나는 빛으로 나가길 두려워합니다.(3,19~20) 하지만 니코데모는 어둠에서 나와 마침내 위로부터 태어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구나 내가 아끼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주어도 이것만은 안 돼’ 하고 움켜쥐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 움켜진 손을 펴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사랑으로 희생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넘어선 행복을 압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내어 주십니다. 백설공주를 사랑했던 난장이처럼, 예수님 또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Jn 13,1) 사랑하시며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위한 ‘자기 비움’의 사랑입니다. 신앙은 은총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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