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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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나리라 죄인을 부러 회개시키러 왔다.” (5,30~31)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의인으로 아니면 죄인으로! 레위는 분명 그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 기준으로 보자면 의인이 아닌 죄인이었고 이는 본인도 그렇게 알고 살았으리라 봅니다. 레위 존재 자체가 죄인이 아니라 그 존재와는 상관없이 그가 하는 일,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에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나를 따라라.” (5,27) 는 예수님 초대의 말씀을 듣고, 그는 행동 중심에서 존재 중심의 삶으로 회개하고 변화하려고 모든 세상적인 재물과 평판 등 “모든 것을 다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5,28참조) 어쩌면 이사야의 선언처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그의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58,11) 라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레위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레위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서, 자신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 동료와 이웃들을 불러 함께 큰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 잔치를 보고 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리며,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5,30) 라고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 중병, 곧 교만과 위선이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임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1~3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레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세상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습니다. 가장 의인다운 의인은 바로 하느님께서 죄인임에도 그를 의인으로 인정하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치는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누군가와 함께 먹다 보면 관계가 깊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고 누군가로부터 초대받는다는 것은 친밀함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때론 불편한 관계로 서먹서먹하던 사이도 함께 식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해도 친교도 이루어지는 자리가 바로 식사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이 붕괴되는 가장 첫 단추는 가족들, 곧 식구食口들이 함께 식사하지 않는 순간부터 출발합니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가정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시고 자신이 선포한 참 생명에 합류하도록 초대하는 방법으로 식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셨다고 봅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일 경우,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초대해 주신 주님과 함께 열린 마음으로 기쁘게 먹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함께 먹는 식사의 자리는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하느님의 뜻을 살았기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식사함은 하느님 친교의 자리로 초대였던 것이고,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돌아서고,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섹스 심벌로 알려진 마릴린 먼로는 3번의 결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목숨을 끊었는데, 가정부가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 보니 전화선이 뽑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끝내 어떤 누구와도 통화하지 못해 죽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척도인 부와 명예는 오히려 우리의 관계가 더 좋아지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어 관계를 더 복잡하게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을 재물과 동일시할수록 지저분한 기분, 부정적인 태도, 관계 장애도 더 커진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지수는 삶의 좋은 것들이란 물건들이 아니라, 좋은 관계의 지표는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통념에서 의인이 아닌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고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먼저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느님과의 친교 밖에서 산다면, 의인들도 죄인들인 그들과의 친교를 맺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당대의 종교적인 통념과도 다르게,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먼저 율법대로의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거나 하지 않거나 상관없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이 당신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병자들이요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가 더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은 구원을 필요 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데 장애나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자비에 내어 맡길 때, 죄가 오히려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나아가는 발판이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자비가 더 풍성하게 내리는 까닭은 바로 인간의 행위나 행업이 아니라 자비가 필요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먼저 작용하고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5,31)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의사로서, 의사인 자신이 환자와 같은 죄인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수 찾아 나섰으며, 그들을 만나면서 과거 잘못된 생활로 인한 병의 진단보다는 우선 그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달래주시고 위로해 주시면서 그들이 자진해서 스스로 그 원인을 고치도록 인도하신 명의名醫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그들의 필요를 꿰뚫어 보시고 그들을 초대하여 환대하고 자비를 베풀어 주어 하느님과의 친교를 되찾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비로운 처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과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을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사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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