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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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애졌다.” (17,2)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산은 평지와 달리 높은 곳이며, 높다는 것은 하늘과 가깝다는 말입니다. 흔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선인仙人과 속인俗人의 차이란 그 존재가 살고 있는 상태, 곧 사람이 머무는 곳이 산인지 계곡인지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성경에서 산은 신성한 곳이고 초월적인 곳이며, 산은 모든 강물이 시작되는 곳이자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 품과 같습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소명 받는 자리입니다. 시편의 노래처럼,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 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23,3.4ㄱ) 그러기에 손이 깨끗하고 마음 정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탈3,1)도,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1열19,8)도 모두 산입니다. 그들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높은 산에서 아빠 하느님 영광의 빛 안에서 당신 또한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심을 통해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하느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9,28. 29) 이렇게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는 것입니다. 변모의 핵심인 빛은 곧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빛에서 나신 빛’(니케아신경)이라고 고백합니다. 순수한 빛, 하느님이 계시는 곳은, 어둠이 없습니다. 암흑과 어둠은 없고 완전한 빛, 광명만이 있습니다. 예전 공동번역서에는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해처럼 변하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빛으로 영광의 빛의 찬란한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높은 산의 명징한 정기와 찬란한 빛으로 고양된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껏 줄곧 스승이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면서 느꼈을 행복과 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느꼈을 행복은 전혀 차원이 다른 행복감이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이런 예수님의 본모습, 참모습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체할 수 없이 벅찬 환희와 충격적인 전율에 들떠서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17,4)라는 표현은 그저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행복감에서 터진 감사와 찬미의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 역시도 그 자리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면 베드로처럼 그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이는 곧 ‘주님, 지금 제가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음이 얼마나 좋은지 더 이상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탄성은 다름 아닌 ‘빛에서 나신 빛’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 대한 베드로의 진솔한 행복감의 표현이라고 느낍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좋겠습니다’, 는 의미는 놀랍다는 뜻인데, 지금껏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그 순간의 기운으로 압도당해 무섭고 떨린 상태임에도 그 경험이 참으로 좋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지만, 참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행복감이었을 것입니다. 앞당겨진 직관의 행복!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 조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창조의 본래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인간 존재는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근심 없이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멸이나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이라 부르는 그 자체를 느끼며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삶이 고단했음에도 참된 행복을 누렸던 예수님께서 산에서 놀랍게 변모하신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자 한 의도는, 다름 아닌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희망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초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당신의 변모 축일을 지내는 저희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삶을 충만하게 살고 허투루 살지 말며 철저하게, 처절하게 살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당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동요나 여하한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없이, 온몸과 마음과 정신과 심령을 다해 지금 여기에서 하는 매사를 전 존재로 몰두하며 온 힘을 다해 결단하며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17,4)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철부지 같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산은 오르면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베드로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베드로에게 있어서 산에서 체험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여기에 머물고 싶습니다.’는 표현은 기도 생활을 통해 혹은 일상생활 가운데 유사 신체험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바람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만난 그 상태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고 싶은 게 인간의 강력한 소망일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저는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들을 때마다 느낍니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고 하고...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그렇습니다. 오르면 내려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도 훗날 예수님의 부활 체험 이후 깨닫게 되었으니 이런 신체험을 만끽하기 위해서 필연코 십자가의 길, 고난의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왜냐하면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영광스런 변모 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를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들처럼 주님의 변모를 통해 알려 주시려는 신앙의 신비를 깨닫고 떠나온 곳, 우리가 가서 선포해야 할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복음을 선포하는 존재가 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17,5)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들어야 만이, 들은 것을 선포하게 됩니다.  들음이 선포의 전제조건입니다. 들었던 사람만이 그 말씀을 선포할 수 있고 실천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산에서 듣고 깨달았던 것을 실천했으며 또 자기의 말을 듣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1, 18.19) 그분의 말씀이 바로 우리 발의 등불이며, 삶의 이정표이기 때문이며, 이를 실천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도 이 체험을 통해 변화의 힘을 얻고, 능력 받아 변화해야 합니다. 비록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할지 몰라도 그 또한 지나갈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단련하고 변화하는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느님과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고 느끼고 체험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미사 때마다 듣게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꿋꿋이 하느님의 완전한 영광의 빛 안에서 영원히 머물 날을 고대하고 희망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당신 빛으로 빛이신 당신을 뵈옵게 하옵소서.”(시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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