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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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젊은 날, 소위 혈기 왕성할 때는 성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눈이 좀 더 열리면서 성서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구약에선 아브라함에게 향한 하느님의 요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는 요구처럼 그리고 신약에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나안 여인에 대한 태도 등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이 그렇지 않나요. 늘 한 없이 자비로우시고 따뜻하시며 사람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접촉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치유하시던 예수님의 입에서 어찌 이토록 인종 차별적 뉘앙스(?)가 풍기는 냉정한 거절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딸의 병고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가나안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를 못 들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제자들이 그 여인 때문에 성가심에 시달리다 귀찮아서 예수님께 하소연하자 하시는 말씀이 고작!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비수가 되어 그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팠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우울한 일요일」에선 이 음악을 듣고 많은 사람이 자살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이 바로, 누군가에게 무시받는 일이며, 무시받고 살기보단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의 싸움을 볼 때 정말 무섭게 싸우는 경우를 봅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그 밑바닥에는 바로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에 상처받았기 때문입니다. “야, 이년아 내가 비록 지금은 돈 없어서 시장에 나와 콩나물을 팔고 있지만 아니 니년까지 나를 무시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큰 모욕이며 치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야,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고 핏대를 올리지만’, 그 자존심마저 버리면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우리는 자존심을 중요시합니다. 그 누군가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토록 그 여인의 가장 깊은 자존심을 건드리시고 아프게 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외견상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몰인정하게 그 여인을 대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흔한 표현으로 ‘위로는 못 할지라도, 개망신은 주지 말아야지요’. 액면 그대로 보자면, 그 가나안 여인이 속된 말로 자기 팔자 고쳐 달라고 매달린 것도 아니고, 분에 넘치는 부귀영화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자기 딸 곧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쳐 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을 간청했을 뿐입니다. 만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낫지 못할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면, 어느 어머니인들 그 여인처럼 도움을 줄 사람에게 미친 듯이 매달리고 애원하며 하소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어머니의 작은 바람이며 몸부림이라고 봅니다. 그런 여인에게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이지 자비로운 예수님답지 않게 느껴지며 거리감마저 느낍니다.

그런데 어찌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우리가 주님의 속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몇 수 뒤까지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 여인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현세적이며 신체적인 치료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더 높고 깊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상의 잔치에까지 그녀와 그 여인의 딸을 이끌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의 마음에 천상적인 믿음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음을 아시고 신체적인 생명을 되돌려 주는 것뿐만 아니라 천상적인 생명을 얻고 또 얻도록 이끄시기 위한 ‘반전의 교육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반전의 교육 방법이란 ‘당신의 외면적인 거절’을 통해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에 내재 되어 있는 천상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치료해 주었다면 그녀가 받은 천상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불씨에 불을 댕길 수가 없었기에 가장 극단적인 무시와 멸시를 통해 자존심에 상처를 줌으로써 그 어둠을 뚫고, 그 바닥을 치고 솟구쳐 생명과 축복의 잔치로 그녀를 이끌기 위한 도전이자 초대였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 여인만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시범 게이스’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참으로 인간이 찾아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은 단지 지상적 잔치상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상적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니어그램’을 만든 구르지예프에 관한 책, ‘인간이라는 기계’에서 구르지예프 또한 제자들에게 지나치게 혹독하고 엄격했더군요. 구르지예프는 잠들어 있지만 자신이 깨어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무시하고 엄청난 행위를 시켰더군요.) 물론 당신의 깊은 의도를 모르는 채 그 여인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기에(=낮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그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억누르면서도 자식의 병을 고쳐야겠다는 반동으로 더 높고 더 깊은 믿음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고대한 예수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애걸한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무시하고 저를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으며,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으로도 족하고 족하오니 제발 제 자식 병만 고쳐주십시오.’ (15,25와 27참조) 드디어 극단적인 교육 방법을 선택한 예수님의 의도가 그녀의 겸손 어린 고백으로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고 그 여인이 대견스럽고 참으로 사랑스러웠으리라 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으로 기적을 베풀고 관심을 쏟았던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는데, 뜻밖에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에게서 그토록 크고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얼마나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우셨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녀의 딸을 치료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녀의 무시와 멸시당해 찢기고 부수어진 그녀의 영혼을 치유해 주시고 하느님 딸로 거듭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하더라도 우리는 그 깊은 절망의 시간과 자리를 견디어 내고 마침내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에서 참으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참으로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그녀는 자기가 개 취급받아도 개의하지 않고 자신을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그런 무시와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 따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자들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개도 될 수 있고 그것보다 더한 것도 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은 저를 흔들어 깨웁니다. 아마도 제가 이 복음의 깊은 내용은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은 제게 치명적인 약점인 사랑이 없다는 사실과 참으로 제 목숨과도 같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개 취급당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 알량한 자존심도 다 내팽개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토록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것인가 봅니다. 아 오늘만큼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1고린 13,7)

(의문: 가나안 여자는 본디 이런 덕행을 가지고 태어났을까요? 아니면 어머니가 되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무엇이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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