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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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2,16)
    
무죄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마태1,21) 위해 태어나신 기쁨과 평화의 성탄을 지내는 성탄 8일 축제 동안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오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을 지내는 것이 무척 아이러니합니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며 생명의 고귀함의 무게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으로 자기 왕권에 위협을 느낀 헤로데는 예수께서 태어난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2,16) 어처구니없는 집단 살인, 학살을 범합니다. 무모하고 무자비한 폭군의 폭력성과 그로 말미암아 희생되어 죽은, 순교한 아이들의 주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후대가 비록 축일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고 해도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는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2,18) 는 예레미야의 절규가 가슴을 저미어 옵니다. 그 까닭은 억울한 죽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로 끝나지 않고 세상 곳곳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헤로데의 왕권수호를 위해, 피해망상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을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바로 그들의 죽음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며 영원히 외칩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고, 왔더라도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2,2)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요셉도 꿈에 천사의 말을 듣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지 않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여러 퍼즐을 이렇게 저렇게 맞추어도 결국 예수님의 탄생과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2,15) 피할 수 없는 비극은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인간과 함께하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불신과 거부에 상관하지 않고 당신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가 되었기에 더 이상 지체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함께하시려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써 그 신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뜻하지 않은 인간의 거부와 저항의 표지인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원을 미루지 않으시고 인간의 죄와 거부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무죄한 아이들의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구원하시려는 뜻’에 대한 반발과 거부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마음에 되새기면서 오늘의 축제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라는 본기도의 말마디와 입당송의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영원히 외치네. 주님 영광받으소서.” 라는 표현은 천상에서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크신 구원의 관점에서 그러하리라고 믿고 싶지만, 인간적인 시선에서 볼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지 헤로데의 무지와 불신앙만이 아닌 빛을 두려워하는 인간 내면의 어두움이 빚은 죄이기에 역사를 통해서 무죄한 아이들이 지금도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가?’라는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이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자극해서 빚어진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는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죄와의 대립이 인간과 구원 역사의 현실이며 구원 과정인가 봅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들의 많은 삶의 고통과 시련 중에 가장 큰 고통과 상실은 바로 오늘 축일처럼 철없고 힘없는 자녀의 죽음을 직면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느낍니다. 자신의 가장 비참한 가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함의 순간은 아마도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이며 죽음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죽어간 자녀들의 고통과 그것을 받아들여만 하는 부모들의 고통의 무게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죽어가는 아이들의 불행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이 아이들에겐 비참하고 참혹한 일이겠지만, 불행과 행복 그리고 이별과 죽음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죽어간 아이들보다 오히려 그럼에도 살아남은 부모가 받아야 할 고통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십니까?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죄책감의 무게를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피 흘림의 순교’를 당했다면, 부모는 ‘피 흘림 없는 순교’를 자기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는 내적 고통과 상실감 그리고 무력감을 가진 채 살아야 합니다. 이는 또한 이후에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알게 될 마리아 역시도 자기 자녀인 예수로 말미암아 수많은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살면서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요. 그리고 훗날 무죄한 아드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바라보면서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부모들의 고통을 당신도 겪으면서 모든 어머니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품에 앉고 계시는 피에타상을 통해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이제 그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순교는 단지 어제의 순교가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구원의 신비이며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신앙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이별은 재회로, 죽음은 생명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믿고 희망하기에 오늘 축일의 어둡고 슬픈 속에서 기쁨으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은 먼저 헤로데의 음흉하고 사악한 생각을 미리 알아차린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2,13)하게 하시고, 헤로데가 죽을 때 또다시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15)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복음은 그 피할 수 없는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의 배경을 구세사적인 관점에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자신을 무시한 박사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에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2,16) 고 오늘 축일의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에 대한 처절한 묘사를 복음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2.18) 이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단지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2,14)라는 예언처럼 새로운 희망이, 구원이 시작되기 위해 선행 조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코 정적인 흐름이 아니라 때론 지나칠 정도로 동적이고, 암울한 절망 속에서도 역동적인 희망을 성취한다는 것을 믿고, 오늘 복음과 축일이 가져다주는 슬픈 기쁨, 어둔 광명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곡선도 직선으로, 절망도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잉태하실 수 있는 자비와 사랑의 구원자이십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알렐루야.” (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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