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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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성체 성가 중에서 좋아하는 성가는 원선오 신부님이 작곡한 「엠마우스」입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이 노래는 가톨릭 성가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잘 부르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한 성가입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우리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결정적인 신앙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신원과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강도는 지금껏 살아 온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행복의 기쁨이 크면 그만큼 불행의 슬픔도 큽니다.’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동안 수많은 치유와 기적들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참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보내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충격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위기는 지나온 삶의 탄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위기의 순간에는 확신할 수 있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투명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갑작스레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명료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은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런 상태야말로 죽음의 순간이며 부활과 먼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클레오파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또 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인 나와 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깊은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영적인 맹목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24,16)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지만, 영적인 맹목 상태에 있었기에 제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였고,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흔히들 사랑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랑보다 눈이 밝지 못합니다. 눈이 먼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지요. 집착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자기 자신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고 잘못 믿어버린 나머지 거기에 매달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집착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행복의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냅니다. 이런 제자의 상태를 마르꼬 16,12에는,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죠. 우리 또한 제자들과 동일한 상태는 아닌지요? 예수님은 우리네 삶과 인생길에서 우리와 함께 늘 동행하고 계시지만, 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길을 걸어가면서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만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의 중요성,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또한 깊은 슬픔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24,17)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경험적으로 슬픔과 눈물은 타인의 존재와 위로를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처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이죠. 저의 경우엔 어머니의 죽음의 체험은 저에게도 동일하게 하느님의 현존과 위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리스도 추종의 길’을 멈추어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픔의 상태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의 상태였습니다.(24,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상대적으로 기대가 크면 그 충격도 정비례해서 크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지나친 기대는 실망을 낳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나 요구는 세상적인 차원에서, 현세적인 측면에서 당장의 이득을 바라고 기적을 예수님께 요구하셨지만, 예수님은 더 높고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실망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까닭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며 거부하고 배척하고 죽이려는 게 인간의 나약함이고 어리석음일지 모릅니다.

또한 그들은 불신앙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24, 22-24)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 들일만한 믿음이 없었고 결국 스스로 불신앙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아버렸죠.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2코4, 7.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체념과 인내로 모순과 슬픔을 견디어 내도록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적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시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신 다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치유의 단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24,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늘 가까이 오시어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아볼 수 없는 우리의 맹목을 보시고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요? 하지만 탓하지 않고 먼저 가까이 오심으로 은총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십니다. (24,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는 질문은 그들의 불안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문제를 지닌 사람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어찌하면 좋을지를 알고 싶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귀를, 시간을 내주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이 곧 제자들의 문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문제 핵심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면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모든 인간은 위기와 사건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사랑의 방법이며 선물입니다. 사랑은 결심이며, 그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기를 들어주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신 다음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24,25) 아직도 귀가 멀고 눈이 먼 제자들은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선입견, 고정관념 때문이고, 곧 그들이 아직도 영적 귀머거리이고 영적 장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치려고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경은 사건의 해설이 아니라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입니다. 요한복음 5, 39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체험하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들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길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여유와 여백은 차츰 눈이 보이고, 귀가 열리면서 ‘어어 이게 아닌데 하며’ 마음이 뜨거워질 때 변화는 기적처럼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사랑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도록 아픔을 나눕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스스로 원해서 청할 때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을 때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방안을 찾게 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타인을 수용하고 초대할 때 이미 문제는 사라집니다. 자기 집착이나 집중보다 타인을 집중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풀리게 됩니다. 또 초대받은 자가 초대하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즉,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때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늘 주님께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주님을 모실 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나누어주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를 봄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체험을 알리기 위해 떠나왔던 형제들에게 되돌아갔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처음 떠나왔던 삶의 자리, 갈릴레아로 되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부활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굳게 하고 체험한 바를 나누고 증거 하게 하며, 생명을 얻게 합니다. 기쁜 소식 곧 부활 체험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마음을 밝게 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그래서 위기와 절망에서보다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은총이자 생명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시고, 저희와 함께 묵으시며 빵을 떼어 주십시오. 아멘”

 부활 제3주일 : 루카 24, 13 – 35
  
저는 개인적으로 성체 성가 중에서 좋아하는 성가는 원선오 신부님이 작곡한 「엠마우스」입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이 노래는 가톨릭 성가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잘 부르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한 성가입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우리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결정적인 신앙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신원과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강도는 지금껏 살아 온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행복의 기쁨이 크면 그만큼 불행의 슬픔도 큽니다.’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동안 수많은 치유와 기적들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참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보내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충격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위기는 지나온 삶의 탄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위기의 순간에는 확신할 수 있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투명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갑작스레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명료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은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런 상태야말로 죽음의 순간이며 부활과 먼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클레오파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또 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인 나와 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깊은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영적인 맹목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24,16)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지만, 영적인 맹목 상태에 있었기에 제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였고,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흔히들 사랑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랑보다 눈이 밝지 못합니다. 눈이 먼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지요. 집착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자기 자신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고 잘못 믿어버린 나머지 거기에 매달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집착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행복의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냅니다. 이런 제자의 상태를 마르꼬 16,12에는,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죠. 우리 또한 제자들과 동일한 상태는 아닌지요? 예수님은 우리네 삶과 인생길에서 우리와 함께 늘 동행하고 계시지만, 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길을 걸어가면서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만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의 중요성,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또한 깊은 슬픔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24,17)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경험적으로 슬픔과 눈물은 타인의 존재와 위로를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처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이죠. 저의 경우엔 어머니의 죽음의 체험은 저에게도 동일하게 하느님의 현존과 위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리스도 추종의 길’을 멈추어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픔의 상태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의 상태였습니다.(24,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상대적으로 기대가 크면 그 충격도 정비례해서 크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지나친 기대는 실망을 낳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나 요구는 세상적인 차원에서, 현세적인 측면에서 당장의 이득을 바라고 기적을 예수님께 요구하셨지만, 예수님은 더 높고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실망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까닭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며 거부하고 배척하고 죽이려는 게 인간의 나약함이고 어리석음일지 모릅니다.

또한 그들은 불신앙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24, 22-24)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 들일만한 믿음이 없었고 결국 스스로 불신앙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아버렸죠.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2코4, 7.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체념과 인내로 모순과 슬픔을 견디어 내도록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적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시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신 다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치유의 단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24,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늘 가까이 오시어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아볼 수 없는 우리의 맹목을 보시고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요? 하지만 탓하지 않고 먼저 가까이 오심으로 은총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십니다. (24,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는 질문은 그들의 불안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문제를 지닌 사람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어찌하면 좋을지를 알고 싶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귀를, 시간을 내주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이 곧 제자들의 문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문제 핵심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면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모든 인간은 위기와 사건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사랑의 방법이며 선물입니다. 사랑은 결심이며, 그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기를 들어주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신 다음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24,25) 아직도 귀가 멀고 눈이 먼 제자들은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선입견, 고정관념 때문이고, 곧 그들이 아직도 영적 귀머거리이고 영적 장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치려고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경은 사건의 해설이 아니라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입니다. 요한복음 5, 39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체험하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들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길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여유와 여백은 차츰 눈이 보이고, 귀가 열리면서 ‘어어 이게 아닌데 하며’ 마음이 뜨거워질 때 변화는 기적처럼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사랑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도록 아픔을 나눕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스스로 원해서 청할 때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을 때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방안을 찾게 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타인을 수용하고 초대할 때 이미 문제는 사라집니다. 자기 집착이나 집중보다 타인을 집중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풀리게 됩니다. 또 초대받은 자가 초대하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즉,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때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늘 주님께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주님을 모실 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나누어주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를 봄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체험을 알리기 위해 떠나왔던 형제들에게 되돌아갔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처음 떠나왔던 삶의 자리, 갈릴레아로 되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부활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굳게 하고 체험한 바를 나누고 증거 하게 하며, 생명을 얻게 합니다. 기쁜 소식 곧 부활 체험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마음을 밝게 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그래서 위기와 절망에서보다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은총이자 생명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시고, 저희와 함께 묵으시며 빵을 떼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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