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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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십니까? 한가위 미사를 드리는 관계로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대천사 축일을 축하하지 못했는데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강원도 홍천 초등학교 ‘최의정’ 어린이가 쓴 「변덕쟁이」라는 시를 읽어 보려고 합니다. 『 오락가락 하루에도 여러 번, 햇살 쨍쨍, 주르륵, 꽝꽝. 날씨야 날씨야 너는 왜 변덕이 심하니? 변덕쟁이 너 때문에 우산 쓰다. 우산 벗다. 나의 하루가 바쁘다.』변덕스러운 것은 날씨만이 아니라 요즘 물가도, 아파트 시세도 변덕이 심해서 야단입니다. 변덕스러움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변덕스러움의 극치는 아마도 사람일지 모릅니다. 어느 젊은 친구의 하소연, 제가 애인을 만나 사귄 지 일곱 달이 되었죠. 그녀는 그때부터 너무 많이 달라졌어요.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다음 날은 우울함의 바닥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변덕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의 움직임을 나도 모른다는 게 정확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느 때고 변심할 수 있고 변덕을 부릴 가능성이 농후한 존재이지요. 이에 반해 하느님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늘 처음과 마침이 한결같으신 분이시지요. 변덕스런 인간의 나약함을 하느님은 알고 계시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서도록 인내로써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와 두 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우리는 엿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약점을 지닌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최선과 최악의 경우 수란 그렇게 많지 않나 봅니다. 즉 ‘네’하고 응답하고 ‘네’를 실행하는 최선의 경우도, ‘아니오’ 하고 거부하고 ‘아니오’라고 실행하는 최악의 경우란 거의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내적 여정은 오직 맏아들이 보여준 ‘아니오’에서 ‘네’로 수용하는 경우와 아니면 다른 아들이 보여준 ‘네에서 아니오’로 불응할 수 있는 경우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편의상 두 부류로 나누어보죠! 한 부류는 오늘 복음의 맏아들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 그리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 다른 부류는 오늘 복음의 다른 아들과 탕자의 비유의 큰아들 그리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대비해 보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첫 부류의 인물들은 인생의 초반기 모습이 거칠고 불경해 보였지만도 차츰 자기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나가는 거룩한 변덕을 보였다면, 둘째 부류의 군상들은 처음에는 화려하고 거룩하게 보이다가 끝내 자기 안에 갇혀서 어둠과 자기모순으로 굳어가는 변덕을 부렸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때론 인간의 변덕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향할 때 미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미덕입니다. 거짓된 혹은 형식적인 뉘우침이 아닌 하느님의 뜻과 하늘나라를 위한 참된 뉘우침이, 변덕이 필요로 합니다. 우린 많은 인생의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올바른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 어머니 살아계실 때 가끔은 누이들을 향해서 “너희들도 너 같은 자식 낳고 나면 에미 속 알 것이여! 사람은 지껴(=겪어)봐야 알어!” 즉 온몸으로 느껴야 만이 참으로 부모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도 스스로 겪어봐야 만이 왜 하느님께서 내게 이런 길로 부르시고, 이런 일을 요구하신 가를 깨닫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참된 뉘우침과 돌아섬이 가능합니다. 물론 자기 잘못을 알면서 자책하고 자학하면서 자기 실망에 빠지는 경우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뉘우치고 뒤늦게나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늘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다면 진정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제대로 된 삶을 살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18, 28)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느냐 아니면 모르고 있느냐’의 차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많이 아는 만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인생의 초반부에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그 뜻을 뒤늦게 알고 나서는 이내 그 앎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들에겐 이보다 더 큰 모욕적인 말은 없을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21,31)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 조건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을 사시면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4,34)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게 당신 존재 이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당신 파견의 목적임을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자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성하도록 우리를 당신 제자로, 동반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제자 된 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 필리피서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향해 돌아선 존재이고, 하느님을 향해 돌아선 자는 하느님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2,1~5참조)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소속한 가정이나 본당 혹은 수도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친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친교를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는 다름 아닌 우리 각자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입니다. 인간이 왜 변덕스러울까요.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변화가 오늘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하느님 나라의 표현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이루고자 하신 하느님 나라는, 교회는 한 마디로 친교입니다.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을 바탕으로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 우린 먼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름은 상이성이고 상이성은 다양성입니다. 배척과 갈등의 요인이 아닌 보완과 보충의 관계이며 선물입니다.
 
 또 다른 미덕은 겸손(=겸손한 마음/필2,3참조)입니다. 겸손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물은 부드럽고 늘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물이 흐르지 않고 자기 안에 갇히면 멀지 않아 썩어버리고 교만해지고 허영심이 발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친교에 필요한 다른 하나는 자기 사람만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도 돌보는 봉사입니다. 봉사는 희생이 고통이 따릅니다. 형제애가 커지기 위해서는 자기 버림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봉사는 가족 중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찾아서 챙기고 보살피신다. 가정에서 어머니처럼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봉사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정말 친교와 형제애가 넘쳐 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공동체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교회 안에서 어머니처럼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면서 친교를 이룹시다.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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