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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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경건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드러난 비전은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자체)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바로 유대 경건자들과 근본적인 차이와 차별이 드러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나라’에 관한 것임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관해 어떤 처신을 해왔고,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점은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선의 좌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과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한 선행의 실패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바, 곧 하늘나라의 선포를 실천해 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단호히 선으로 악을 대처하는 대신 자신을 악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견책하신 듯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 곧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인 밀밭에, 악과 배격해야 할 악의 가치인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그 실체, 곧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13,28)라고 악의 실체를 인지하고 직시하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과도 상반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게 진솔한 세상(=교회/가정/개인)의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당황스럽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즉각, 가라지(=악)을 보고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13,28)라고 대응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잠시라도 직시하고 직면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졸속한 해결책에 “아니다. 가만두어라.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29~30)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농사법은 세상의 농사법과 다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성급함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신앙의 시선)에서 신중히 바라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악을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는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처신이 엄청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방안처럼 들릴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런 방안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시초에는 선과 악을, 밀과 가라지를 분명하게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목 현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목자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입견에 따라서 성령 운동이나 다른 신심 운동, 혹은 어떤 봉사활동이나 모임 등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가리지(=악)를 뽑으려다 밀(=선)까지 말살하지 않고는 악을 세상(=교회, 공동체, 가정이나 개인)에서 멀리 몰아낼 능력이 애당초 인간에게는 부족하고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밀과 가라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보면 밀까지 뽑아버릴 수가 있으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밀과 가라지 뿌리가 서로 얽히게 되어 있어서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밀까지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고, 이를 아시는 예수님은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30)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악(=개인, 그룹이나 부류)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구별 지으려고 했고 함께 더불어 공존하고 공생하기보다 배격하고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자신들의 약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종교의 엘리트 의식 곧 선민의식에서 자신들은 거룩하고 교회 밖에 사람들은 죄스럽다고 단정하고 확신했기에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고 의식에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태도는 무엇보다 먼저, 일단 타인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내 탓보다’ 늘 ‘네 탓’으로 돌려 면피하려고 합니다. 그 책임을 돌리기 시작하면 우리네 삶의 태도는 좀 더 신중하게 자기 일이나 하겠다, 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악의 실체를 인식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꿋꿋이 선을 실행하는 길’ 밖에 달리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다 보면, 끊임없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제약하는 곳이 어디든지 율법을 반박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으로만 하늘나라를 현실화하려고 묵묵히,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보다 현실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13,30.39.43) 

여러분의 가정이나 공동체의 밭에도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가라지를 인식하고 인지할 때, 어떻게 처신하고 대처하며 살고 계십니까? 


    연중 제16주일(2): 마태오 13, 24 – 43

1973년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발표함으로써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하나의 대중적인 명제이자 화두가 되었습니다. 슈마허는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한 문장에 함축했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한다는 주장, 오직 수치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성공, 환경에 대한 무지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고 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계화나 경쟁력 같은 사회경제적 가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교회의 성장이즘도 반성해야 합니다. 크고 화려하게 성전을 짓는 게 성장의 척도는 아니지 않나요? 행사의 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화려한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와 그리고 하찮은 작은 누룩처럼 하늘나라는 무한한 성장의 비밀, 외적 성장이 아닌 참된 내적 성장 그리고 파급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씨가 그렇지만 특별히 작은 겨자씨는 땅에 뿌려지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찾기도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도 그 시작은 겨자씨와 같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언젠가 큰 나무처럼 장대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사랑한다는 그리고 고맙다는 한마디 말이 하늘나라의 시작입니다. 겨자씨처럼 잘 보이지 않은 작은 말 한마디나 행동이 나의 주변을, 세상을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만듭니다. 하늘나라는 먼 곳이 아닌 여기에, 하늘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닌 작고 하찮은 나의 따뜻한 말과 길을 걸으면서 쓰레기 하나라도 줍는 작은 행동이 하늘나라의 시작입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고 숙성시킵니다. 또한 누룩은 빵을 맛있게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누룩은 처음에는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많은 양을 발효시키며 맛을 내는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빵을 부풀게 하고 맛을 내는 누룩처럼 내적 변화(=부풀림과 맛을 냄)는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의 출발입니다. 사랑으로 자신부터 변화하기 시작해서 점차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참된 내적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누룩 같은 능력으로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공동체에 맛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의 신비를 자신의 삶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누룩의 사람이 진정으로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신 까닭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13, 13)고 지난 주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 복음에서 재차 “예언자(=이사야)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13,35)라고 명백히 다시 밝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루17,21) 하지만 우리는 볼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기에 하느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눈이 있는 사람은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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