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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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어언 70년 훨씬 넘게,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꽤 긴 시간이지만, 우리 민족의 심리적 시간은 언제나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길 바라는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명절 때면 가끔 이산가족 상봉을 보곤 하였지만, 이제 이마저도 중단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한때 남과 북이 참으로 소통하고 왕래할 날이 곧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잖아요. 남북의 화해, 곧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며 성취되어야 할 소원입니다.

복음은 우리 민족에게 남북통일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너희가 한반도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예전 마더 데레사 성녀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분열을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남북의 모든 이가 한 마음으로 그 어떤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남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 라고 언약하신 대로, 두 사람 곧 남과 북이 함께 기도하면 꼭 남북통일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화해를 위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에,4,29)라고 강조하듯이, 서로 좋은 말로 상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저해하는 행위 곧 신뢰를 깨는 악의惡意 찬 상호 비방을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뢰 회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첫걸음은 바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나 되는 방법으로 용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느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때 이렇게 강론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통일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옆의 형제들을 용서하십시오.” 사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릅니다. 가족 간에 서로 미워하며 갈라지고, 이웃과 직장동료와 국회에서도, 또 교회에서도 서로 갈라지면서 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한다고 한들 뭐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부터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더 큰 용서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을 때 따라오는 것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할 횟수는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죄의 크기,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강도, 이 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한번 잘못하면 그것으로 관계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속였다면 더 이상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라면 서로 잘못하고 다시 화해하고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흔히 ‘가족은 웬수다.’라고 말합니다만, 가족은 아무리 잘못해도 함께 살아야 할 피붙이기에 결코 단절하고 절교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또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마 부부는 몇 번 싸웠다고 결별하고 이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이혼하면 남남이 되겠지만, 형제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가장 많이 다투는 것은 형제끼리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싸웠다고 갈라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습니까?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18,21) 라는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제 형제가 몇 번이나 저에게 죄를 지으면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 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일곱 번 ? 형제가 나에게 일곱 번 잘못하고 나면, 그 관계는 끝내야 할까요 ? ‘형제’ 라는 표현에 구체적으로 얼굴을 넣어 봅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내칠 수 있을까요 ? 형제와 다툰 경험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설령 형제가 일흔여덟 번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형제라면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형제의 관계입니다. 설사 수 많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쉽게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레위기 19장 17에 보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생략)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설사 형제가 잘못한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해서는 아니 되고 오히려 형제가 돌아오게 하여 함께 살아야 만이, 진정으로 형제 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 이 두 가지는 그 형제를 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궁극적으로는 형제 라는 관계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화해의 노력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남북은 화해가 필요한 형제 관계입니다. 

예수님 용서의 가르침은 상생의 실천입니다. 즉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win win의 가르침입니다. 패자가 없고 단지 둘 다 승리자 되는 것입니다. 즉 용서는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일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열 살 때, 동네 오빠가 자신을 성폭행하려 하자 반항하다가 온 몸에 칼질을 당하고 죽어가면서, 그 청년을 용서한다고 말했을뿐더러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감옥에서도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은 마리아 고레띠가 감옥에 있는 그에게 나타나 그를 회개시켰습니다. 그는 깊이 회개하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살다가 귀천하였습니다. 마리아 고레띠가 용서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구원 못 받고 그 청년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는 둘 다 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정권을 지배하는 김씨 가문과 이들을 떠받들고 살아가는 일부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이지, 단지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모든 북녘 동포들을 미워하고 적대시해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남북통일은 정치적 이념 차이로 서로 갈라져 대립하는 우리 서로가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응어리를 없애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만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나라에 통일을 주실 것입니다. 통일, 통일 외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민족 화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용서의 시를 바칩니다. 

『용서의 반대말은 증오랍니다.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증오합니다. 증오를 하면 사람을 죽이고 용서를 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에는 사랑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사람은 원망만 합니다. 자기만 알아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남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기에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면 행복해집니다. 자기도 남도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도 남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자기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면 남의 상처도 감쌀 수 있습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감사함도 없고, 긍정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단지 남의 탓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이 용서해달라고 하기도 전에 용서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 속에 숨겨진 자기의 잘못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는 망각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며, 덮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을 하면 섭섭함이 쌓이지도 않고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면 또 하나의 용서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난 용서해 주는 분량만큼 용서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체 어리석은 인간이 되곤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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