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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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배움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여라.”(5,48.43.44)고 가르치십니다. 

흔히 남녀가 연애하며 서로 사랑할 땐, ‘당신 없이 난 못 살아!’ 하더니,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단물 다 빠지고 나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못 살아!’가 된다고 하더군요. 여러분은 경험으로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사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에 ‘부부가 원수’가 되고, ‘천생연분이 평생 원수’가 되는 것이라 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잘 알고 있겠지만,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녀는 악처로 유명한 여자였답니다. 크산티페의 특징은 입이 거칠고 성격이 포악했나 봅니다. 소크라테스를 향해 1분에 한 번씩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정말 대단하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들으면 시끄러운 물레방아 도는 소리도 자꾸 듣다 보면 전혀 괴롭지 않게 됩니다.” 한번은 크산티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소크라테스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천연덕스럽게 앉아있자, 찬물을 한 바가지 떠와서 남편에게 확 들이부었습니다. 갑자기 물까지 한 바가지 얻어맞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비참하기를 넘어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천둥 번개가 친 후에는 소나기가 올 줄 알았지!” 원수가 따로 있지 않고, 마누라가 원수이며 남편이 원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부부 사랑도, 가족 사랑도 이웃과 원수 사랑도 사랑의 바보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5,39),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5,44)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일단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면(=원수와 같은 북한의 김정은 혹 일본의 아베 등)에서 원수라기보다 일상에서 만나고 있는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으로 제한해서 생각해봅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쉽게 원수라고 생각하면,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 고통을 주고, 한마디로 나를 불행케 하고 내 인생을 망친 사람으로 연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원수’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달리 악인이나 원수를, 불쌍한 사람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사실 ‘남의 뺨을 친 사람이나 재판을 걸어 남의 속옷을 가지려는 자나,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한 사람이나, 달라고 하고 꾸려는 이들은 정말 힘겨운 사람, 곤궁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로 그들 모두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전 소련의 수상 후르쉬쵸프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은 다 그런대로 이해를 할 수가 있어도 '누가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마저 돌려 대주라'는 말씀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남의 뺨을 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거나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재판을 걸어 남의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한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과 어떤 것을 달라고 하고 돈을 꾸려고 했던 이들은 정말 곤궁에 빠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이나 원수를 나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보지 않고,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그 사람으로 본다면, 그 악인과 원수는 바로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또한 내가 악인으로, 원수로 여겼던 이들의 처지에서 바라보면, 나는 그들의 악인이고, 원수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악인과 원수는 나와 전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웃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 말씀이 더욱 이해가 갑니다. 결국 이 모든 말씀의 요지는 사랑에 어떤 조건도 달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고, 표독한 자나 의인을 차별하지 않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잔머리를 굴리며 주판알 굴려 이해타산을 따지는 이기적이고 가식적이고 소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모두를 품어 안는 대지와 태양처럼 무조건 퍼주는 어리석은 사랑입니다.

사실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치면 자식만큼 부모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자식 때문에 부모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 자식 때문에 불행하더라도 자식을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자신에게 자식이 잘해도 사랑하고, 잘못해도 사랑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자녀가 어떤 사람이든, 그 자녀가 자신들에게 어찌하든 사랑합니다. 자녀가 부모인 자신들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자녀를 사랑할 뿐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의 판단이나 실행은 자식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부모의 우선적인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완전하신 것처럼 부모들도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본능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은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에 악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욕설에 욕으로, 주먹에 주먹으로, 복수심에 복수심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응할 때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듯이 결과는 서로에게 심각한 생채기를 남깁니다.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만일 대응해야 한다면 어둠에 빛으로, 미움에 사랑과 용서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것,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너무나 어려운 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바보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길처럼 현명한 길은 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결과는 잔잔한 평화이며 지속적인 마음의 평정입니다.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것입니다. 악이 다가올 때 악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 큰 인내와 내 큰 관대함, 내 큰 사랑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 더 큰 희망, 더 큰 인내와 측은지심으로 악을 억제하려는 그런 노력을 실천해보도록 합시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보호하면 그 ‘원수같은’ 남이 결국 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협력하는 것은, 내 몸속의 유전자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고 말합니다. (=인용문에서 ‘원수같은’ 표현의 저의 삽입구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행동의 도덕적인 완벽함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완전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기적 사랑을 이타적인 사랑, 무조건적 사랑으로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울 때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도킨스 또한 ‘약육 강식’에서 이긴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를 한 종種이, 결국 이기심보다는 이타심을 실천하는 종이 더 우수한 형태로 살아남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곧 내가 잘 살기 위해 남을 도와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향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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