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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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1866년에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을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로 인한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소설이지요. 런던에 사는 지킬 박사는 학식과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날 먹으면 도덕심이 없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하이드 씨)으로 변신하는 약을 발명합니다. 선과 악의 두 성질이 한 인간에게 공존하는 것이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한 박사는 그 한쪽만을 빼낸 것입니다. 그런데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약을 쓰지 않아도 ‘하이드 씨’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히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과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오늘날 ‘지킬과 하이드’는 이중인격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수난과 성지 주일이라는 이중적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 주일 전례의 독서와 수난사에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상충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는 우리를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 이끌어 주는 긴 이야기입니다. 수난사화에는 예수님의 태도와 각 인간 군상들의 응답이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여러 작은 그림들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특히 유다,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 예수님과 빌라도, 예수님과 군중들, 예수님과 군인들, 예수님과 조롱하는 사람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야기가 진전되어 갈수록 비하와 모욕이 심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에게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와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은 철저한 침묵으로 그 중심에 홀로 서 계십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혼란스럽고 소란한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나온 여러 부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군중들이며 그들의 상반된 반응이 충격적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의 군중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열열한 모습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군중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겠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행하시리라 기대하였고 설렘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기대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군중들과의 상반된 태도는 이미 고향 마을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었다고 봅니다. 그토록 열렬히 환영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다구니를 쏟아냅니다. ‘하이드 씨’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군중의 모습입니다. 불과 닷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은 이젠 완전히 악의 집단으로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변덕맞음과 배의망덕이라니.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도 군중들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러운 군중들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군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과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하느님 앞에 인격적인 만남과 그 만남에 따른 체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신앙은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덮어쓴 채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 있지 않고, 변덕스러운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2000년 전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큰 만큼 극단적으로 그분의 용서와 사랑은 훨씬 넓고 길고 깊고 높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었던 백인대장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 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에서 건져 주실 분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에서 깨어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죽음의 여의사’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이렇게 일깨웁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합니다.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지 말라’. 오늘 가장 값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군중들처럼 마치 죽지 않을 사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마음 한 가운데!”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활에 초대받고 동참할 것입니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아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마태오 26, 14 – 27, 66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1866년에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을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로 인한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소설이지요. 런던에 사는 지킬 박사는 학식과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날 먹으면 도덕심이 없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하이드 씨)으로 변신하는 약을 발명합니다. 선과 악의 두 성질이 한 인간에게 공존하는 것이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한 박사는 그 한쪽만을 빼낸 것입니다. 그런데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약을 쓰지 않아도 ‘하이드 씨’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히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과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오늘날 ‘지킬과 하이드’는 이중인격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수난과 성지 주일이라는 이중적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 주일 전례의 독서와 수난사에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상충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는 우리를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 이끌어 주는 긴 이야기입니다. 수난사화에는 예수님의 태도와 각 인간 군상들의 응답이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여러 작은 그림들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특히 유다,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 예수님과 빌라도, 예수님과 군중들, 예수님과 군인들, 예수님과 조롱하는 사람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야기가 진전되어 갈수록 비하와 모욕이 심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에게서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와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은 철저한 침묵으로 그 중심에 홀로 서 계십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혼란스럽고 소란한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나온 여러 부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군중들이며 그들의 상반된 반응이 충격적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의 군중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열열한 모습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군중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겠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행하시리라 기대하였고 설렘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기대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군중들과의 상반된 태도는 이미 고향 마을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었다고 봅니다. 그토록 열렬히 환영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다구니를 쏟아냅니다. ‘하이드 씨’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군중의 모습입니다. 불과 닷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은 이젠 완전히 악의 집단으로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변덕맞음과 배의망덕이라니.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도 군중들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러운 군중들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군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과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하느님 앞에 인격적인 만남과 그 만남에 따른 체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신앙은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덮어쓴 채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 있지 않고, 변덕스러운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2000년 전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큰 만큼 극단적으로 그분의 용서와 사랑은 훨씬 넓고 길고 깊고 높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었던 백인대장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 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에서 건져 주실 분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에서 깨어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죽음의 여의사’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이렇게 일깨웁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합니다.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지 말라’. 오늘 가장 값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군중들처럼 마치 죽지 않을 사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마음 한 가운데!”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활에 초대받고 동참할 것입니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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