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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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행동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목자이자 신학자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처절하게 살고자 깨어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묻고 답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 까닭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 정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유다인을 보호해 줄 것인가? 사회의 잘못을 눈감고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고 생명을 구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 앞에 고뇌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고뇌와 기도 끝에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는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라고 결론짓고 반나치 운동과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1945년 4월에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는 본훼퍼의 깊은 신앙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은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느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는 남들이 말하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를 고뇌하면서 결국 하느님의 시선에서가 본 내가 아니면 참된 내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어쩌면 요한만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알려주었고,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리기에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께 세례를 드렸으며, 그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던 요한 자신이 지금은 마치 그 확신을 잃어버린 듯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11, 3) 라고 질문하도록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그의 의혹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그가 예수님이 오실 그분이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례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요한의 예상과 달랐던 것일까요 ? 어쨌든 요한은 믿음의 어둠을 겪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보고 듣는 것’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입니다. 눈먼 이들, 나병 환자들, 귀먹은 이들이 치유를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그 응답을 끝맺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을 읽는 제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6절) 이 말씀은 요한 20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선포가 ‘보고’ 믿었던 토마스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는 다음 세대, 곧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이 복되다고 선언하는 것이듯,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말씀 역시 이미 의심을 드러낸 세례자 요한보다 오히려 우리를 향해, 우리가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요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듯 싶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에게 한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우리를 위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보고 듣는 것’ 이 믿음의 근거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 2천 년 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를 저는 이들이 걸었다는 것 ?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확인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요 ? 복음의 뒷부분은 이러한 우리의 의심을 확신으로 이끌어 줍니다. 군중이 떠나간 다음 예수님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어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인물입니다. 그 요한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 하고 물으십니다. (7절)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았느냐 ?’ 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를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예수님보다 앞서 왔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또 그들 안에서 ‘오실 분’ 이 와 계심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 <믿음은 환하지만 믿음의 길은 어둡다.>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겪은 것과 같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도 믿음의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한테도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근거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입니다. 고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러 왕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믿기’ 어렵다면,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없다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한 자리, 내가 있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행실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행실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 그분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눈먼 이들을 보게 해야 합니다. 탐욕에 눈먼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ㅡ 그분은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균형을 잃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그러움으로 걸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교만함의 종기로 더럽혀진 사람들을 겸손의 약으로 깨끗하게 치유해야 합니다.
    - 그분은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경청하여 그들도 듣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죽은 이들을 되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죽은 이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살 맛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살 맛나게 해야 합니다.
    -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몸을 양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보이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실로 예수님은 평가받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 까닭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해서.’라고 결론짓고 실천에 옮겼던 본훼퍼처럼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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