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日是好日

2019.12.25 06:35

노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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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일어났던 사실들을 임의로 취사선택 혹은 누락, 증폭시켜 편집을 한다. 그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겪은 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그림이 된다. 성탄전야미사를 우이동에서 드린 적은 분명 많았을 터이나,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다. 그리고 어제 구유예절을 시작하면서 나는 32년 전의 그날이 오늘과 공존하는 체험을 하다.

 

87년 말 성탄미사때 나는 새 신부였지만 연일 계속되는 피정지도로 헌 신부, 늙은 신부가 되어 있었다. 당시의 사순절이나 대림절 기간에는 정말 매일같이 피정이 있었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고장 난 녹음기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기계같이 여겨질 정도로. 대림절 피정스케줄의 마지막 피정지도를 마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감실 앞에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잠이 들었고 꿈을 꾸게 되었다. 마당에 잡초가 무성히 자란 쇠락한 초가집이 보였다. 툇마루에 앉은 노인네는 곧 쓰러질 것 같이 기운 기둥에 기대어 졸고 있었고…….잠에서 깨며 즉시 알 수 있었다. 저 노인이 바로 나의 지금 상황이구나 하고…….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오늘 나는 피정지도로 지친 것이 아니라, 병고를 아는 몸으로 구유예절을 하러 동일한 장소에 서게 되다. 구유가 차려진 곳은 현관이다. 재미있게 구유도 마다 않으신 그 뜻과 일맥상통하게 구유를 설치한곳도 화장실 바로 옆이다!

 

32년 전에 느꼈던 그 감흥이 다시금 재현된다. 우리가 깨끗하고 조찰한 영혼이어서 한 아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필요로 하기에 기꺼이 오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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