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깨침과 지혜의 시작입니다.]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탄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삶 앞에 아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매 순간 삶 앞에 정진하고자 하는 겸손의 태도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말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이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중국 고전에도 이와 같은 의미로 삶 앞에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줄 아는 것이 곧 깨침과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대상이 하느님이던, 인생이던, 타인이던, 나 자신이던, 매번 해 왔던 것처럼 느끼는 일이던 간에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를 자신 안에 가두어 놓는 격이요, 삶의 신비 속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자기 소외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을 배워갈수록,
하느님도, 타인도, 하물며 안다고 어느 순간 착각했던 나 자신마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일인지를 조금씩 배워가는 시간들이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공동체 미사 강론)